저자 김인국 신부, 출판사 생활성서사, 정가 15,000원, 수도회 도서실 소장
*정의구현사제단으로부터 기증 받음
시작도 끝도 산에서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처음도 산상 설교(마태 5,2), 맨 마지막도 산상의 설교(마태 28,16)였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첫 강의도, 최종 강의도 산에서 들었던 것입니다. 어쩌다 그리됐는지 모르겠으나 산에서 시작하여 산에서 끝낸 데는 무슨 곡절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산상 설교의 원조는 따로 계십니다. 하느님은 모세와 일흔 원로들을 시나이산으로 불러(탈출 24,1) 법과 규정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탈출 24,3) 하고 한목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대로'란 무엇보다 '세상과 다르게 살기'였습니다.
남다른, 근본과 바탕이 전혀 새로운, 세상 어디서도 보지 못한, 그래서 매우 낯선, 그러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인 그런 '외로움으로'라는 뜻이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을 길이건만 "나는 걸어 보리라." 선뜻 다짐하고 나서는 모습에서 옛사람들의 깨끗한 심성을 발견합니다.
다르게 들었으니 다르게 살아라
예수님이 동서남북으로부터 몰려든 군중(마태 4,25)을 상대로 첫 설교를 펼치시던 날, 제자들은 산 위 스승 곁에 그리고 군중은 산 아래에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시나이 산상 설교를 재현하려는 듯 모세가 원로들과 함께 산위에, 백성들은 산기슭에서 대기하고 있었던(탈출 24,1) 것과 정확하게 포개집니다.
그런데 교수법이 독특했습니다. 시종 "너희는 그렇게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을 텐데 지금부터는 다르게 듣고 다르게 행동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른바 '대당 명제(對當 命題)' 여섯 개가 그것입니다. 격에 맞으면서도 훌쩍 격을 뛰어넘는 통쾌한 해석에 듣는 사람마다 크게 감동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하였습니다."(예레 15, 16) 하던 선인들과 달리 신선한 응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세월 따라 신중해졌는지 영리해졌는지 차차 되는 걸 보아 가며 결정해야지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마치고 하산하시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8, 1)고 나오지만 겉모습이 그랬다는 것뿐입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해하고도 남을 반응이었습니다. '밥'이나 주시지 어째서 '법'을 주셨는지요! 알던 대로 알려 주고 살던 대로 살라고 했으면 따르기 쉬었을 텐데, 정반대로 하셨으니 누군들 지레 겁먹고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보복 대신 폭력의 단념을, 미움 대신 원수 사랑을, 거짓 대신 진실을, 불안 대신 천하태평을 요구하셨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라면 모를까 덜렁 도장부터 찍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난의 술이든 축복의 잔이든 '따기 전에 따져' 보고(루카 14, 28-32) 얼마든지 궁리해 보라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대답해 봅시다. 자, 어찌하시겠습니까.
미련한 사람, 슬기로운 사람
신구약 모두 산상 설교의 마감 주제는 실천하는 슬기입니다. 하느님은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신명 4, 6)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내 말을 실행하여라"(마태 7, 24) 하셨습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어처구니 없는 인생 말고 철두철미 실천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묻습니다. 자, 어쩌실 겁니까?
어진 스승의 그늘 아래 살게 되었으니 과분한 은총이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야속한 생각이 물러서려 하지 않습니다. 오른뺨이든 왼뺨이든 밥 먹듯 얻어터지며 겉옷부터 속옷까지 탈탈 털리는 경우가 다반사, 밤낮 남의 짐 져주느라 허리가 휘어 버린 줄을 훤히 아시는 분이 거기다 보태어 십자가를 짊어지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해서 복되고, 울고불고 슬프니 복스럽고, 배부르게 욕먹고 핍박을 받아서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시는데 무슨 심술이 이리도 고약하실까요.
흔들리는 우리 속마음을 들여다보셨는지 "아무 걱정 마라. 덕은 덕으로 오고, 복은 복으로 오느니 천주를 굳게 믿어라." 하시지만, 덧붙여 "기왕 따르려거든 억지로는 말고, 보물 묻힌 밭을 발견한 농부가 아주 신이 나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치우듯 꼭 그렇게 하여라." 하시는 대목에서 다시 한번 멈칫하고 맙니다.
고성능 폭발물이나 다름이 없는 주님의 엄률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진퇴양난의 신세만 한탄한 세월은 실로 길었습니다. 보다 못한 교회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산상 설교에 담긴 지침들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니 그러다가는 사생활에서나 공생활에서나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1975년판 스위스 천주교회 교리서)
장대의 높이를 낮춰 주려는 선의를 왜 모르겠는가마는 이것은 건축주이며 설계자인 목수께서 튕겨 놓은 먹줄과 눈금을 뭉개 버린 치명적인 불경입니다. 예능 프로그램 '골목식당'에서 최선의 레시피를 알려 주고 몇 달 후에 가 보면 제멋대로 조리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건 아니야, 내가 언제 이렇게 가르쳐 주었나...."
백종원 씨의 슬픈 낯빛을 볼 때마다 내 인생의 꼼수를 들킨 듯 부끄럽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해충은 '대충'이라던데 나의 대충대충 때문에 복음이 제 맛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합니다.
드러내라, 새로운 세상을
예수님은 일엽편주 같은 신세라도 일편단심,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을 가지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들 고단하고 고달픈 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행동이 필요하나니 너희가 반드시 다른 삶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내가 메시아가 맞고,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이 틀림없다면 너희가 나서서 그 거룩한 나라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손에 잡히는 현실이 되게 하여라.
첫 설교 때는 제자들이 스승 곁으로 다가갔는데(마태 5, 1), 마지막 설교 때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가 이르셨습니다(마태 28, 18). 왜 달랐을까요? 처음에는 배움에 목말랐던 제자들이 "한 말씀만 하소서, 저희가 듣나이다." 했지만, 최후에는 스승이 조바심을 내어 "이 말만큼은 들어다오,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했던 때문일까요?
코로나-19 이전까지는 입교자가 날로 줄어들어 걱정이었는데 코로나 쇼크 이후에는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게 더 걱정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近者悅), 먼 데 있는 사람이 설레어 달려오게(遠者來) 하는 단순한 비결은 삼천 년 전에 이미 공개되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와 아드님의 단순명료한 산상 설교 그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런 삶이 그립거나 궁금한 사람을 위하여 소설 "난주"(김소윤작)의 일독을 권합니다. 조선의 본래 믿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 김인국, 사람이 좋아 사람이, pp.233~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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