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는 올해 개봉한 영화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된 영화다. 세계 각종 영화제를 휩쓸고 있는 배우 윤여정 덕분에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라는 사실을 깜빡하곤 한다. 봄철이면 냇가에 뭉치로 자라던 미나리가 어쩌다 한 가족의 이민사를 대변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벌레나 병에 강하고 아무렇게나 심어도 뿌리 내리는 강한 생명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간다.
<미나리>를 보려고 영화관을 찾았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의 접촉을 지양하고 거리두기 중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상을 탈 때마다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무색할 지경이다. 달랑 일곱 명 앉아 있는 상영관 뒷자리에 내자리 하나를 더 보탰을 뿐이다. 그렇다면 재미가 없다는 것ㄴ데 영화 <미나리>는 제93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내뿜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온 가족의 고달픈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살던 곳을 등지고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 이들에게 따라붙은 불가피한 상황과 갈등을 보여준다. 농장을 일구고 싶은 제이콥(아빠)과 병원 가까운 도시에서 살기를 바라는 모니카(엄마) 부부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지점에 심장병을 앓는 아들 데이빗(아들, 외손자)이 있다.
부부의 직업은 병아리 감별사다. 부화장에서 부화 후 30시간 이내에 암컷과 수컷의 항문을 손으로 열어서 식별한다. 시력이 좋고 색맹이 아니며 손이 세밀하고 침착한 사람에게 잘 맞는 직업이란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19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 이민자중에 이 직업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병아리 감별사는 이민자들의 가장 만만한 생존수단이었던 셈이다.
수컷 병아리를 폐기하는 이유를 묻는 아들에게 아빠는 "맛이 없거든, 알도 낳지 않고...그러니까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 해."라고 대답한다. 문득 감별사로 일하면서도 농작물을 재배해 보겠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댈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남의 나라에서 설 자리를 마련해보려는 제이콥의 몸부림이 무겁게 다가온다.
일터로 떠난 부부의 빈자리에 모니카의 엄마 순자(외할머니)가 손주를 돌보러 온다. 말도 통하지 않고 쿠키도 구울 줄 모른다고 손주의 타박을 받는 순자의 모습은 수십년 전의 영화 <집으로>를 연상시킨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일곱 살 상우(손자)가 외딴 시골에 혼자 살던 말 못하는 할머니와 지내게 되는, 두 달간의 동거를 그린 영화다. 이정향 감독은 할머니가 자신에게 준 사랑을 기억하며 이 땅의 모든 할머니에게 바친다는 메시지를 남겼었다.
아예 말을 하지 못하는 상우의 할머니와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입을 떼지 못하는 데이빗의 할머니는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부모의 부재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을 덜어내고 따뜻한 위로를 줄 뿐 아니라 무료한 시간을 재미와 지혜로 채워준다. 손주들은 어떤가. 투덜대고 놀리다가도 결국에는 세대 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통심하는 방법을 눈치 챈다.
할머니가 손주를 돌보게 되면 아무래도 스트레스와 체력적 한계를 느낀다. 그러나 딸이 처한 팍팍한 현실을 알고 있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말없이 손을 보태게 되는 것이다. 예고 없이 나타난 딸이 손자를 두고 떠났을 때 상우의 할머니도 그랬고, 멀리 타국까지 와서 처음 보는 이동식 바퀴 달린 집에서 살게 된 데이빗의 할머니도 그랬다. 안타깝게도 데이빗의 할머니 순자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영화에서 하나의 사건은 또 다른 사건을 불러올 때가 많다. 그래야 숨은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데이빗의 심장이 좋아졌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던 날이었다. 몇 번이나 거절 당했던 농작물의 새로운 거래처를 찾은 날이기도 했다. 작물 보관 창고에 불이 난다. 순자가 불편한 몸으로 쓰레기를 태우다 실수로 불이 번졌다. 더 이상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집이 아닌 엉뚱한 길로 접어드는 순자를 숨이 차게 뛰어가 돌려세운 것은 가짜할머니라고 볼멘소리를 내던 데이빗이었다.
영화<미나리>는 스크린에 풀어 놓은 에피소드로 고단한 삶의 흔적들을 드러낸다. 그래서 농작물 창고가 다 타버린 어두운 벌판에 제이콥의 가족만이 남겨졌을 때, 그것은 이미 그들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마다 각각의 경험은 다르겠지만 고된 정착과정을 거쳐야했던 모든 이민자들의 드라마가 된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도 잘 자란 순자의 미나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는 삶에 희망으로 뿌리내린다.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 영화에 투영했다고 한다. 그때는 말하지 못한 할머니에 대한 감사와 위로를 담은 셈이다.
*글쓴이, 이희섭, 가톨릭여성연구원 미디어 영성팀, 품 제154호, 확대경 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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