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전주교구 소속 김진화 신부
새해 첫날, 교회는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면서 말씀으로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백성들을 축복하되 주님의 이름으로 빌어주라는 당부를 제시하고 있다. 축복이란 본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아론의 뒤를 이은 사제들은 '모든 복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나의 이름을 불러 백성들에게 평화의 복을 전하라.'는 사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들고 곧장 축복하신 모든 것에게 주어진 축복이 이어지게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교구 사제들은 이 무렵 사제인사 이동 시기를 겪게(?) 되는데, 임기 동안 사목했던 곳에서 충분히 그리고 고루고루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 주었는지 성찰해 볼 일이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동물이건 하느님의 축복이 막힘 없이 전해져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지켜 주시고 계시는지를... .
혹여라도 내 능력, 내 경력에 걸맞지 않은 작은 소임지를 불평하며 인사 이동에 관심을 보이며 더 크고 여유있는 소임지를 원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매번 미사 때마다 '평화를 빕니다'하고 평화를 권유하지만, 정작 내 밥그릇을 푹 덜어내어 백성에게 내놓는 일에는 무디게 살아오지는 않았는지를.
나와 잘 맞는 교우들과는 마음을 터놓고 평화롭게(평화는 밥을 나누는 것) 지내면서 여러 면에서 나와 맞지 않는 교우들과 동료 사제들을 축복하는 일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를.
하느님은 비를 골고루 내려 주신다고 말하면서도 소임지에서나, 그리고 미사를 통해 내려오는 축복의 비를 골고루 뿌려주어 백성들의 잎이 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도록 북돋아 주었는지를.
주임으로서 축복보다는 운영과 관리감독에 더 많은 고민과 시간을 사용하지는 않았는지를.
사제는 스스로 축복의 권위를 갖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축복의 권위가 있음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를 돌이켜 보고 결단해야 새로운 사목지에서 나도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을 것이다.
코로나로 교우들의 신앙과 본당의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교회를 바라보는 눈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교우들도 눈에 보이는 그리고 손에 잡히는 축복을 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불안해진 현대 세계를 바라볼 영적 축복을 청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상황이다. 이들에게 평화와 구원에 대한 축복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사도 3, 26). 그런데 그분은 분명히 자신을 낮은 사람에게 보여 주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셨다. 따라서 사제가 축복하며 제시해야 할 가장 크고 궁극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기에 진정한 복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누리는 참 행복일 것이다. 우리가 축복을 빌어 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새 소임지에서는 강함보다는 약함에 더 많은 축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제들의 소임 아니겠는가? 강하고 능력 있고 여유 있는 곳에 가는 축복은 축복의 주인이 사제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축복의 권위는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축복할 때 권위는 더욱 충만해질터.
*발췌/갈무리 <빛두레> N.1587, 교회와 세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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