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질서를 드러내는 리더십
*글쓴이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불 병거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
고대 근동 세계에는 민족과 종교가 무척 많았고 그만큼 예언자의 종류도 다양했다. 일찍이 쳉어(E.Zenger)는 이스라엘 예언자만이 '저항 예언자'라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밝혔다. 오직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이스라엘 특유의 예언 운동 시작점에 엘리야가 있다.
엘리야는 세상의 권력과 대립했다. 북이스라엘 아합 임금은(1열왕 16,29) 시돈 임금 엣바알의 딸 이제벨과 혼인하였고 "바알에게 가서 그것을 섬기고 예배하기까지 하였다"(31절). 그 결과 이스라엘에 바알이나 아세라 등 다른 신을 섬기는 종교인이 흔해졌다.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은 왕궁을 등에 업고 행세했지만 야훼의 예언자들은 동굴에 숨어 지내는 지경에 이르렀다(18,13). 하느님 백성이 그분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엘리야는 그런 세상에 기대할 것이 없었다.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세상을 보며 탄식했다. 그리고 세상에 맞서 그분의 뜻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모든 백성이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한다고, 오직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고 외쳤다. 세상 질서에 맞서 하느님의 질서를 선포한 것이다.
그는 임금도 거침없이 비판했다. 아합 임금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일을 비판했고(21,17-19) 아합의 아들 아하즈야 임금까지 비판했다(2열왕 1장). 카르멜산에서는 홀로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1열왕 18,22) 싸워 이겼다.
하느님 백성은 그도 외면했다. 하느님의 뜻도 외면하고 그분께서 보내신 분도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어리석고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 32,9; 33,3.5; 신명 9,6.13)일 뿐이었다. 다른 백성과 하등 다를 것 없었다.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셨으니, 응당 그가 하느님 백성에게 지도력을 행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퍽 달랐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뜻을 전한 대가로 탄압을 받았다. 아합 임금은 엘리야를 "내 원수!"라고 불렀고(1열왕 21,20) 아하즈야는 엘리야를 잡으라고 장수를 거듭 보냈다(2열왕 1,9-16).
엘리야는 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결국 승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의 삶이 편안해진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방랑하며 저항하는 예언자의 삶을 살았다.
다행히 그의 종생(終生, 생의 마지막)은 거룩하였으니 수제자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불 병거를 타고 회오리바람에 실려 승천한 것이다(2,11).
이후 저항 예언자가 북왕국과 남왕국에서 줄줄이 이어졌다. 그를 계승한 예언자들은 백성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리는 데 애썼다. 엘리야는 결국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남았다.
회개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
신약성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도 세상에 별로 바랄 것이 없는 시대를 살았다. 헤로데 임금의 권력은 하느님에 의지한 것도 백성의 사랑에 기반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점령군 로마인들에 빌붙은 결과였다. 백성 사이에는 종말론적 기대가 일었다.
뒤숭숭한 시대였다. 세상이 곧 망하고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 역사에 전면적으로 개입하시리라는 예감이 백성을 뒤덮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백성의 기대는 실현되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보면 어떤 패턴이 반복됨을 알 수 있다. 백성은 어떤 계기에 큰 체험을 하고 나서 하느님의 뜻을 새롭게 깨닫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마음이 느슨해져서 그분에게서 슬며시 멀어진다. 그렇게 인간은 과거의 죄를 다시 짓는다.
엘리야의 시대와 세례자 요한의 시대는 거의 800년 차이가 나지만 묘하게 닮았다. 백성이 망국과 유배를 겪으며 하느님 뜻을 새롭게 깨달았으나 다시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백성이 하느님을 믿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회개하여라."(마태 3,2) 하고 외치며, 세상의 질서에서 물러나 광야에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께 새롭게 마음을 돌리라고 하였다.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외치는 목소리가 응당 하느님 백성의 중심적 리더십을 형성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엘리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실은 달랐으니, 그는 세상 한복판이 아니라 광야에 머물렀다.
불행하게도 엘리야와 달리 그의 삶은 비참하게 끝났다. 헤로데의 제수(이자 아내)인 헤로디아가 세례자 요한에게 앙시믈 품었고 계략을 꾸며 그를 죽였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헤로디아 앞으로 가져다주어졌다(14,11). 치욕적인 죽음이었다.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흔히 예형과 원형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을 빼닮은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은 그분 예형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6,13)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을 예수님께 답하였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예레미야 등 예언자라고 한다는 것이다(14절).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을 직접 체험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분을 엘리야 예언자나 세례자 요한의 재림으로 이해했다는 뜻이니 이들이 예수님과 얼마나 닮았는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사람의 아들이 와서 세상을 거슬러 고난을 받으리라고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의 사례를 들어 가르치셨다(17,10-13 등).
두 인물 모두 세상과 타협하지도 세상의 권력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세상과 맞선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의 리더십은 그저 세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신학은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를 따라 살라는 것이었다.
두 예언자 모두 세상 질서보다 훨씬 크고 근본적인 하느님의 질서를 보여 주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면서 당신의 예형들이 발전시킨 일을 완성시키셨다.
세상의 모든 지도력, 특히 하느님 백성의 지도력은 무엇보다 하느님과 그분 질서에 순종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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