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지만 홀로 있지 않습니다-창조적 고독
*글쓴이 박재찬 안셀모,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신부
외로움(loneliness)을 넘어 고독(solitude)을 찾아서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업 때문에 부무님과 떨어져 지내야만했다. 친척 집에서는 눈칫밥을, 자취방에서는 '혼밥'을 먹었다. 때로는 외로웠고, 가족과 함께 지내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초등학교 6학년 운동회 날, 어머니가 농사일로 바빠 참석을 못 하셨다. 얼마나 서운하던지 책상에 엎드려 서럽게 울었다.
그때 어린아이는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이제 혼자다. 절대 울지 말자!" 지금 생각하면, 아들의 운동회에 갈 수 없는 어머니 또한 마음이 무척 아프셨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어린아이에게 이 일은 '사람은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 준 사건이었다.
홀로 있는 시간이 길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이 아이는 어느새 자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그리고 참된 삶은 복잡한 세상에서의 외적인 성공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세상과 분리되어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봉헌학, 기도하고 일하며 욕심 없이 살아가는 수도원에서의 삶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수도원이야말로 그간의 외로움을 보상해 주고 하느님만을 찾으며 참된 고독을 누릴 수 있는 완벽한 장소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시던 부모님의 기대를 뒤로하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고독을 위한 완벽한 장소는 없다
세속을 떠나 수도원에서 고요히 기도하고, 공부하고, 단순한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외적으로는 고된 시간이었지만 내적으로는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러갈수록 참된 고독은 외적인 장소나 공간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수도원에서 살아가지만 마음과 정신은 외부 세상의 공허한 것들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홀로 독방에 있는 시간이 쓸쓸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견디기 힘든 외로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다양한 유혹이 하느님 앞에 홀로 있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하고, 내적 공허감을 채우려 끊임없이 노동과 사람에 집착하기도 했다.
그렇게 남들에게 보여지는 자신과 홀로 있는 자신의 다른 두 얼굴, 위선의 가면과 거짓 자아에 지배되어 하느님의 자리를 잃어버린 어느 날 영적인 죽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어두운 밤 속에 홀로 내버려진 듯했다. 기도도 할 수 없고 하느님께서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 듯한 무서운 적막의 체험은 수도원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공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머튼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독과 만나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기묘한 섭리로 어둠 속에 있는 이에게 작은 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 빛은 현대 영성가, 토마스 머튼(1915-1968)의 '고독'을 향한 갈망과의 만남이었다.
단순한 감정적 '외로움'을 넘어 스스로 그리스도의 고독과 하나 되고자 한 그의 갈망은 그때까지 필자의 수도 생활 여정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하느님'이 아니라 '나 자신'에 집중하며 살아왔는지 반성하게 해 주었다.
머튼이 말하는 고독은 단순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거나 자기 자신을 내어 줄 상대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더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며 새로운 영적 탄생을 위한 기다림으로, 그리스도의 고독과 만나 더 깊은 사랑의 유대로 나아가려는 일종의 '자기 변형'의 길이다.
머튼은 일기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저 자신에게서 벗어나 ...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이제는 다른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의식마저 없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저의 고독일 것입니다. ... 제가 깊은 고독 속에서 당신의 고독과 만나 당신의 사랑이 되게 하소서"(Entering the Silence: Becoming a Monk and a Writer, p.49).
그에게 고독은 홀로 하느님 앞에 사랑으로 존재하고자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자기 비움'이다.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버려 두는 일은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존재, 곧 더 큰 사랑이 되고자 하는 재창조의 시간이다.
자신의 자아가 온전히 비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넘어 '초월된 자아'에 도달하고자 머튼은 진정 하느님 앞에 홀로 머무는 고독을 택했다.
고독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하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 앞에 죄와 잘못으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말없이 내어 보여 드리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그분의 자비로운 품에서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고 정화되는 시간이 바로 고독이다.
또한 그분의 자비와 사랑의 친교 속에서 참된 영적 기쁨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독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더 큰 사랑과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이며 관상의 길이다.
따라서 고독은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께 그 중심을 두고 있지 않으면 고독은 하찮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고 오롯한 마음으로 홀로 그분의 사랑을 갈망하는 어느 날, 성령의 은총은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그렇게 예수님과 하나 되어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사랑과 자유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이 된다.
실로 참된 고독에 들어가 하느님을 만난 영혼은 이제 더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에 홀로 있지만 홀로 있지 않고 모든 곳에서 홀로 있을 수 있게 된다.
우리 사회는 참된 고독이 필요하다
머튼의 가르침을 통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하찮은 생각을 축적하고 거기에 빠져 있었는지, 오만과 궁핍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고독한 척하며 살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낮은 자존감과 열등의식에 빠져서 조그만 실수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토라져 마음의 문을 닫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도피하던 시간이 부끄러워진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던 거짓 고독의 탈을 이제 벗어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그분의 품에 홀로 머무는 일이 자연스러운 삶이 되어 가길 희망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외로운 사람'이 늘어 간다. 홀로 있지 못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고, 누군가를 만나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진정한 고독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작은 상처에도 쉽게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를 외로움의 감옥에 가두고 만다.
우리 사회가 더 큰 사랑을 충만해지려면 고독의 참된 영적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머튼도 지적했다. "사회에는 고독이 필요하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의 영적 고독을 침범하거나 파괴하려는 시도는 그 공동체를 영적으로 질식시키고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인간은 섬이 아니다>, p.364).
참된 고독은 세상과의 단절이나 분리가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도록 돕는 영적 도구이다. 텔레비전이나 모니터, 휴대폰을 바라보는 일을 잠시 멈추고 홀로 고요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간을 자주 갖자. 혀의 침묵, 눈의 침묵, 그리고 상상의 침묵 속에서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러면 그분께서 지금 '나의 외로움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이미 우리 안에 살고 계신(갈라 2, 20) 그분 곁에 홀로 머물면 머물수록,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당신의 그 고독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속삭임을 듣게 될 것이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고독은 그리스도의 참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 발췌, 시대의 징표를 찾는 이들의 목소리 <경향잡지>, n.1856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영원한 지금>, 폴 틸리히, 김광남 역, 뉴라이프스타일, 2008
*<Entering the Silence: Becoming a Monk and a Writer>, 토마스 머튼 외, HarperOne, 2014
*<인간은 섬이 아니다> 토마스 머튼의 사랑에 이르는 길, 토마스 머튼, 장은명 역, 성바오로출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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