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보다 사람
*글쓴이 조현철 신부, 예수회, 녹색연합 공동대표
지난 9월 24일 서울에서 전국 규모의 '기후정의행진'이 있었다. 천주교는 행진에 앞서 세종로공원에서 기후정의행진 미사를 봉헌했다. 두 행사 모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미사는 500명을 예상하고 준비했는데, 성체를 영하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
행진은 주최 측 추산 3만 5천 명이 참석해서 내심 바랐던 규모를 훌쩍 뛰어넘었다. 2019년 기후집회에 5천 명가량이 참여했으니, 기후 문제에 우리 사회의 관심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다.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라는 이번 행진의 구후는 이미 사회적 약자부터 재난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시급하고 심각한 기후 문제가 논의조차 되지 않는 현실에서 기후행진에 시민이 대거 참여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 여세를 몰아 '신규 석탄발전소 철회를 위한 탈석탄법 제정에 관한 청원'도 시민 5만 명의 동의로 접수를 완료했다. 정부와 국회가 할 일을 시민이 한 것이다.
행진에서 더 고무적인 것은 기후 문제를 현상이 아닌 근원에서 보는 시각이었다. '기후정의행진'이라는 행사명이 상징하듯, 기후 문제는 단지 탄소 감축이 아니라 사회 체제의 문제, 정의의 문제다.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기후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이날 집회에 나왔던 '이윤보다 사람'가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자' 같은 손팻말은 기후 문제의 핵심을 드러낸다. 온실가스 대부분은 상품의 생산, 유통, 소비, 폐기의 과정에서 나온다. 생산을 많이 하는 한, 아무리 놀라운 기술을 개발해도 기후재난을 막을 만큼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없다.
생산을 계속 늘리는 것은 더 많은 '이윤' 때문이니 이윤이 아니라 필요를 충족하는 생산으로 바꾸어야 한다. 생산을 늘리려면 소비를 늘려야 하니 더 많은 소비가 더 좋은 삶이라고 사람들을 부추겨 왔다. 그러나 소비의 탐닉은 소중한 삶을 상품으로 채울 뿐이다. 진정한 삶은 소비가 아닌 존재에 있다.
온실가스는 미국을 비롯한 부자 나라가 압도적으로 많이 배출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2020년 '포스코'를 비롯한 11개 기업집단이 전체 국가 배출량의 64%를 차지했다. 기후위기에는 차등적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찬미받으소서>52항).
한편,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가난한 이들은 기후변화에 책임도 적지만 부자보다 먼저 재난의 희생자가 된다. 기후정의의 문제가 도드라지는 지점이다. 지난 8월 수도권을 덮친 폭우로 반지하에 살던 일가족 세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사건은 기후재난의 성격을 축약한다.
이번 파키스탄의 기록적인 홍수도 기후변화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피키스탄의 탄소 배출량은 부국에 비하면 미미하다.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 정의의 구현이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이다.
하느님이 보기에 좋다고 하신, 모든 피조물이 조화롭게 번성하길 바라신 세계, 그러나 이윤을 좇아 거침없이 세계를 파괴하는 인간을 깊이 바라보는 것은 우리를 관상하는 예언자로 초대한다. 하느님의 뜻을 깊이 새기고 그 뜻을 선포하고 실천한다.
개인으로는 할 수 있는 한 소비를 줄여서 하느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소비주의라는 물신에 저항한다. 소비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존재를 더 충만하게 사는 예언자의 삶이다.
(기후정의행진) 미사에 오신 할머니 한 분이 힘들게 바닥에 않으시는 걸 보고 가져 갔던 간이의자를 드렸다. 미사 후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렇게 말씀하시고 행진 속으로 휘휘 사라지셨다. "전 아직 나이가 여든둘밖에 안 됐어요."
*발췌, <빛두레> 교회와 세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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