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허찬욱 도미니코 신부/발췌 생활성서(n.470)
어느 한쪽 손이 더 강하거나 약하지 않을 때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후 죽기까지 2년간의 기록을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제목의 책으로 남긴다. 아니 에르노는 기력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간극이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어머니가 아이일 때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내가 아이일 때는 어머니는 이미 어른이다. 내가 어른이 되면, 엄마와 내가 함께 어른으로 살 줄 알지만, "내가 어른의 나이에 다다르면 어머니는 성큼 노령의 시기로 달아나 있"다(p.133).
기력과 함께 정신도 잃어가는 어머니는 딸 앞에서 아기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아니 에르노는 탄식한다.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어머니가 나의 어린 딸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p.31)
엄마와 딸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지층은 반드시 어긋나고야 만다는 사실을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애잔하게 그려낸다.
자식이 인생의 실개천을 거쳐 겨우 강으로 들어설 때, 부모는 인생의 하류를 지난다. 부모와 자식은 같은 강을 흐르지만, 서로 다른 지점을 지나는 것이다. 같은 시간에 다른 세월의 지층을 만들어 낸다. 맞잡은 손의 힘도 같지 않다. 갓난아이가 잡은 부모의 손은 코고 강하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이제 부모의 손이 자식의 손보다 작아지고 약해진다. 정확히 균형이 맞을 때는 없다. 한쪽이 강하면 다른 한쪽이 약해진다. 이런 어긋남 앞에 부모와 자식 모두 애잔함을 느낀다.
부모와 자식이 같은 시간에 같은 나이를 살아볼 순 없을까? 시간의 단층으로 어긋나지 않고 같은 시공간에서 동갑내기 친구로 살아볼 순 없을까? 이 상상에서 시작한 영화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쁘띠 마망, Petite Maman, 2021>이다.
여덟 살 소녀 넬리는 숲속을 헤매다가 자신과 동갑인 마리옹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만난다. 마리옹은 넬리 엄마의 이름이다. 우연히 이름만 같은 게 아니었다. 넬리는 놀랍게도 여덟 살 때의 엄마를 만난 것이다.
이 사실을 넬리가 먼저 알아채고 뒤이어 마리옹도 알게 된다. 여덟 살 난 딸이 이십 년 전 동갑내기 엄마를 만나 친구가 된다. 5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둘은 함께 지내며 속마음까지 터놓는 친구가 된다.
여덟 살 마리옹은 이십 년 후에 자신이 어때 보이는지 미래의 딸인 넬리에게 묻는다. 넬리는 이십 년 후의 마리옹이 자주 슬퍼 보인다고, 그 이유가 아마도 자기 때문인 것 같다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마리옹이 말한다. "너 때문에 슬픈 건 아니야."
여덟 살의 마리옹은 이십 년 후의 제 모습을 모른다. 자신이 어찌 변할지 마리옹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마리옹은 미안해하는 딸(이자 친구인 넬리)에게 말한다. "너 때문에 슬픈 건 아니야."
미래의 딸이 과거의 엄마에게 미안해하고, 과거의 엄마는 미래의 딸을 앞당겨 위로한다. 이 순간 어긋난 시간의 단층이 하나로 이어진다. 엄마와 딸이 친구가 되고, 모녀의 사랑이 두 소녀의 우정에 녹아든다. 영화 <쁘띠 마망>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영화 <쁘띠 마망>의 이야기처럼 부모와 잠시라도 같은 시간에, 인생이라는 강의 같은 지점을 흘러갈 수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 본다. 동갑내기의 엄마와 딸이 손을 맞잡는다면, 맞잡은 손만으로도 전해지는 두터운 공감이 있지 않을까?
어느 한쪽 손이 더 강하거나 약하지 않을 때, 그때 전해지는 안도감이 있지 않을까? 상상일 뿐임을 안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면 좋겠다는 상상으로 잠시 행복해하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애잔해지는 마음, 영화 <쁘띠 마망>이 전하는 마음이 아닐까.
*대구신학대 학창 시절 허신부님의 (철학)수업을 준비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마냥... 설레이기보다는 두려움이 더 많은 몫을 차지했더랬다. 수업 내용이 무겁기도 하려니와 신부님이 지닌...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아우라'는 교실을 가득채우고도 복도(아니 신학대 캠퍼스) 밖으로 터져나갈 지경이었다....그 시기를 고군분투하며 지난지 수 년이 흘렀지만 그 긴장감만은 여전하다...그런데 이제는 신부님의 '글'을 '고개를 빼들고' 기다린다. 읽고 숙고하고 내안에서 체득하고 체화하는 시간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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