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대상자들에 대한 '탈시설' 논란이 한창이다.
'집'은 좋은 죽음을 보장하는 장소인가, 돌봄과 죽음이 '커뮤니티 케어'라는 이름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 한다. 생애 말기 돌봄에서 '집'은 어떤 의미인가, 환자의 일상은 돌봄의 노동조건에 따라 출렁인다. 한국 생애 말기 돌봄의 흐름은 일종의 '오디세이아'다. 집에서 이뤄지던 돌봄이 집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서사다. '집안팎'에서 착취하고/착취당하고 있는 제도들에 대한 이야기.
*시사IN. n.728, 송병기(인류학 연구자) 글 갈무리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현장 연구를 할 때 자주 듣는 질문, "노인이 그간 살아온 익숙한 장소에서 적절한 돌봄을 받으며 임종할 수는 없을까?".
'왜', '어떻게' 그리고 '누가', '누구를 위한' 질문인가의 문제.
-시설에 거주하는 노인 환자 vs. 보호자 vs. 의사와 간호사 vs. 요양보호사, 간병인 등등
집에서 임종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는 노인의 식사.위생.정서.안전.건강 등을 누가, 어떻게 지속적이고 종합적으로 돌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생계 걱정 없이 집에서 노인 돌봄에만 전념할 수 있는 '가족'은 드물다. 더욱이 집이 시설보다 무조건 낫다는 보장도 없다. 열악한 주거 환경, 사회적 자본이 빈약한 노인에게 집은 안식처라기보다는 고립된 장소다.
생애 말기 돌봄에서 도대체 '집'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상식으로는 믿기 어렵지만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한국인들의 생애 말기 돌봄과 죽음은 집 안에서 벌어지는 '집안일'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 상황이 달라져, 2009년 한 해 사망자 중 63.7%가 '병원사', 이 시기 말기 돌봄과 죽음은 의료보험을 타고 집 밖으로 나섰다. 이전의 '노환'으로 불렸던 것들이 파킨슨이니 알츠하이머니 하는 진단명으로 대체됐고, 의료 전문가들의 관리 대상이 됐다.
2008년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건(폐암 조직검사-과다 출혈로 인한 뇌손상-식물인간-인공호흡기-치료중단vs.치료 지속 갈등...소송)'은 무엇보다 말기 돌봄과 죽음이 바야흐로 환자-보호자-의료진 간의 협상과 결정의 문제가 됐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후로 자기결정권, 시성한 생명, 존엄사, 연명의료 같은 '협상 용어'들이 널리 퍼졌다. 이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실시~'
사람의 '몸'을 만드는 역동적 장소, 어디?
2020년 병원사 비율은 75.6%, 언론보도 '병원 객사'라는 표현은 "집에서 죽는 것이 좋은 죽음(혹은 자연사)이다"라는 가치판단을 담고 있다. 현재 정부는 '지역 사회 통합 돌봄(커뮤니티 케어)' 사업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이것은 "돌봄이 필요한 주민이, 살던 곳에서 개개인의 욕구에 맞는 서비스를 누리고 지역사회와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 보건의료, 요양, 돌봄, 독립생활 등을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지역주도형 사회서비스 정책"이다. 요약하면 생애 말기 돌봄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말, 시나브로 돌봄과 죽음이 '귀가'할 채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집'은 좋은 죽음을 보장하는 장소인가?
집은 무엇보다 사람의 '몸'을 만드는 장소이다. 사람은 생애 초기에 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타인에게 음식물 섭취(nature)와 양육(nurture)을 의존한다. 돌봄 제공자(예컨대 부모)는 거처를 마련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밥을 먹이고, 용변을 치우고, 잠을 재우고, 이름을 지어주고, 말을 거는 행위 등을 통해 돌봄 수혜자(아이)와 관계를 맺는다. 이 상호적 관계는 돌봄을 통해 아이의 몸이 성장할 뿐만 아니라 어른의 몸도 변화를 겪는다. 집에서부터 사람의 몸은 생물학적(nature)이고 동시에 사회적(nurture)으로 형성된다.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사이'를 의미하는 식구(食口)가 가족(家族)의 유의어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집 온돌방 vs. 병원 침대, 환경의 낯섦이나 불편함 때문만 아니라, 자신의 몸과 집에 축적된 관계망의 상실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환자(노인)들이 표준화된 지침에 따라 운영되는 병원이나 요양원이 아닌 '내 몸이 편안한 집'을 선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러한 바람과 현실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누구는 집에서(시설에서도) 빈틈없는 돌봄을 받으며 임종하고, 다른 누구는 집에(시설에서도) 고립되어 사망한다. 생애 말기 돌봄이 환자와 돌봄 제공자의 '삶의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돌봄 제공자의 삶의 조건, '집안일'
생애 말기 돌봄은 대개 집안일로 시작된다. 국어사전은 집안일을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하여야 하는 여러 가지 일. 빨래, 밥하기, 청소 따위'로 정의한다. 집에서 '독립적'으로 살던 사람이 생애 말기에 타인에게 먼저 '의존'하는 것이 이 집안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안일은 대개 여성의 역할로 여겨진다. 생애 말기 돌봄에서 이 집안일은 차츰 간병뿐만 아니라 집안 분위기까지 고려해야 하는 감정노동으로도 이어진다. 집안일=생애 말기 돌봄의 공식이 된다. 달리 말해 '집 안'에 고립되어, 공적 돌봄과 복지의 공백은 개인(집 안의 여성, 가족)의 '도리' '효' '천성' '사랑'과 같은 언어와 실천으로 메워졌다. *박완서 소설<환각의 나비, 1995>
돌봄 문화의 시장 상품화
2000년대 들어 공적 의료보험과 요양보험을 비롯 사회제도 확대, 가족 새대 구성의 단순화,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 증가 등의 사회적 흐름은 생애 말기 돌봄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즉, 전문성이 필요없는 '집안일'은 시장에서 그 가치가 낮게 매겨져 대개 여성이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 되었다. 더구나 건강보험에 간병급여가 빠져 있기 때문에 병원에서 간병은 보호자가 하거나 환자가 간병인을 고용해서 해결해야 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안에 들어 있어도 요양보호사들의 노동조건은 비참하고, 제도 밖에 있는 간병인은 노동자로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집 안팎에서 '착취'를 조장하는 제도들
가령 간병인은 병원 내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24시간 환자의 손과 발이 되고 있지만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대개 간병인은 근골격계 질환 등에 시달리고 있고,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요양보호사들 또한 고강도 육체노동과 다양한 폭력(예컨대 노인들의 침 뱉기, 욕하기, 꼬집기 등등)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사람들이 이들을 '아줌마'로 호칭하는 것은 돌봅노동을 여전히 집안일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2000년대부터 시행된 보험/제도들은 성별화된 집안일로 초그라든 생애 말기 돌봄을 '사회화'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집 안팎에서 '착취'하고 있다. 그 결과 존엄한 돌봄과 임종을 희망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운(가족운, 간병인운 등등)이 좋아야 한다. 생애 말기 돌봄 앞에서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도생 혹은 각자도사(各自圖死)하고 있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조기현씨가 치매 걸린 아버지를 집에서 홀로 7년간 돌보다가 결국 주민센터를 찾았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사려 깊은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신이 공적 돌봄을 받을 만큼 '아프고 불쌍한' 사람들인지 각종 서류로 증명하라는 요구였다. 이제껏 정부는 이러한 집 안의 목소리들을 '가구'나 '세대'라는 통계적 단위로 표준화하고, '수급자'나 '부양의무자' 따위의 행정적 인격으로 대상화했으며, 질병의 문제로 여기고 의료시설로 떠넘겼다.
그렇게 집 안의 구체적 목소리들은 '사적'이라는 이유로 힘을 잃었고, 집 밖의 특정한 기준들은 '공적'이라는 이유로 활개를 쳤다.
-'집'을 둘러싼 이 '양극화'가 생애 말기 돌봄을 궁지에 빠뜨린다. 환자 곁에서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회적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가뜩이나 옹색하고 시혜적으로 보이는 '공적 돌봄'을 받기 위해서 한자는 자신의 몸과 집의 비참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환자는 집에 고립되거나, 군말 없이 요양원이나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환자의 일상은 열악한 돌봄 노동조건에 따라 출렁인다.
이런 맥락을 제쳐두고 생애 말기 돌봄과 죽음을 ''탈시설', '다시 집'으로 끌고 오자는 주장은 허망하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커뮤니티 케어'가 특정한 기준으로 선정한 환자 집에 비대면 의료기기를 설치하고, 문턱을 제거하고, 가끔 사회복지사나 의료인이 방문하는 사업은 아닌지 우려된다.
집에서 죽으면 '좋은 죽음(혹은 자연사)'이고, 시설에서 죽으면 '나쁜 죽음(혹은 객사)'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존엄한 죽음은 집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울려 퍼지는 '집 안의 목소리들'에 달려있다.
**글쓴이가 참고한 도서;
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