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세상
오랜만에 마주친 수녀님이 하필 바이러스 감염 지역에서 오셨다.
자신을 조심하라던 수녀님의 신신당부에 적당히 반가움을 표시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 아직도 어색하다.
바야흐로 언택트(untact)시대다.
반갑다고 하는 악수, 격려한다고 토닥이는 포옹은 언제부턴가 민폐가 되었다.
코로나 시대가 요구하는 삶은 왠지 주님의 컨택트(contact, 마태 10,7-12) 명령과는 정반대로 가는 듯하다.
100nm크기의 바이러스가 세상의 흐름을 정지신킨 후 불확실성이 사회 곳곳에 만연하다.
누가 바이러스에 걸렸는지, 저 사람은 만나도 되는지,
또 이 상황은 언제 끝날지에 대해 아직 아무도 확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종료되더라도 이전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예측만이 꽤 확실해 보인다.
마스크는 어느새 예의를 넘어 자신을 보호해 줄 방어막이자 감염 시대에 만연한 불안의 상징이 되었다.
게다가 마스크보다 더 두꺼워진 마음의 벽들은 전염병뿐만 아니라 서로의 정(情)마저 걸러낼 지경이다.
나병 환자를 꼭 껴안으심으로 당시의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어기신 주님의 모습(마태 8, 3)을
겁 없이 따라 하기엔 이번 바이러스의 영향력이 치명적이다.
다가가기도, 서로에게 말을 걸기도 조심스러워진 세상이 되고 나니,
불과 얼마 전까지 누렸던 그 많은 자유가 호사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일이 일어난 다음에야 분명'해지는 게 맞는가 보다.
새로운 인식과 흐름
뉴 노멀(new normal)에 걸맞은 신조어들이 미래전망과 함께 쏟아진다.
누구는 인류 역사를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구분하자고까지 한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환경, 문화 예술, 그리고 종교 영역에서마저 새로운 인식과 흐름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돌풍은 개인의 불안과 이기심뿐만 아니라
선진국(이라 여겼던 나라)들의 허세스러운 가면마저 벗겨내었다.
반면, 고난에 대한 연대 의식, 인류애, 기도의 힘은 가혹한 환경에서 역경을 이겨내는 가치로 체험되고 있다.
돌아보면 코로나가 가져온 일련의 상황들은 의미와 표징들로 가득 차 있다.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퍼지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가 도전해야 할 사명"이다.
(교황 프란치스코)
우리 시대의 축성생활자들 역시 이 표징을 알아내고 해석하는 가운데 소명을 직시할 도전에 초대되었다.
복음의 핵심을 향한 쇄신의 소명
변화와 적응은 인류 역사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등장해 왔다.
약 1,000년 전, 노르웨이에서 이주해 온 바이킹들과 북미에서 온 이누이트족이
그린란드 땅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는 중세 온난기여서 그린란드도 목축하기 충분할 만큼 따뜻했다.
그러다가 1,300년경 '소빙하기'가 시작되면서 추위가 심해지자 두 부족의 운명이 갈린다.
목축, 식습관, 의복, 가옥 등 노르웨이의 전통 방식만을 고수한 바이킹은
환경에 살아남지 못하고 결국 추위과 굶주림으로 '소멸'한 반면,
이누이트족은 가혹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새로운 체계와 문화를 시도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생존'하고 있다.
중세 도미니코회 신비 신학자 타울러(1300~1361)는 그래서 위기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여겼다.
위기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창조적으로 해결하라는 주님의 초대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포한 쇄신(Aggiornamento)은 성령의 영감과 시대의 표징을
담대하게(parrhesia) 읽고 창의적 대안을 마련한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 예라 하겠다.
그렇다면 복음적 핵심을 향한 쇄신의 소명을 위해 축성생활에는 어떤 의문들이 제기되어야 하는가?
관상가로서의 정체성
그를 그답게 하는 정체성의 재조망은 좋은 출발점이다.
간혹 타종교 수행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세간의 주목이 될 때가 있다.
그들이 무엇을 누리고 어떻게 살든 그게 무어 그리 죄 될까마는,
정체성과 실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동떨어지다 보면 사람들에게 실망 이상의 상처를 남기는 것은 물론,
'그다움'의 향기마저 사라져버린다.
수행기도로써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결단 이외에는 정체성을 회복할 별다른 도리가 없다.
수도자란 누구인가?
또 이 시대에 수도자답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20세기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수도자는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눈 아래'에 자신을 두며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는 일에 온 생을 바치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수도자는 자아포기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에 도달하며,
삶이 곧 그리스도(필리 1, 21)가 되는 신앙의 성숙을 이룬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Sequela Christi) 삶의 가치와 복음적 생활양식으로
하느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마태 6, 10) 투신한다.
이 시대에 수도자가 자기 소명의 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상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 선포 자체가 관상적 행위이며, 침묵의 기도 없이는 하느님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관상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감염병 시대에 우리 주변에는 질병의 위협이나 경제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에 비해 수도원 안은 너무 조용하고 또 너무 안전해 보인다.
우리 안에 깨어 있는 마음이 부족해지면 세상의 다급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안전지대 안으로 움츠러들 위험이 있다.
우리도 예외 없었던 '필요한 거리두기'가 '호화로운 고립'으로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예언자적 직무가 약해졌거나 사명이 마비됨을 느꼇다면 한번쯤 성찰해 볼 일이다.
혹시 나의 거리두기가 현실 속 이웃들의 힘겨운 삶에 대한 거리두기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
안전탑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이기적 자가격리는 아니었는지,
무료함과 무력감 속에서 의미와 표징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관상 없는 활동은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한다.
반면, 기도 안에서 이루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거룩한 삶의 바탕이 된다.
시대의 심각성과 특정 상황의 모호함으로 이미 많은 혼란들이 야기되고 있다.
이 혼란은 식별의 대상들이기에, 위기의 시대에는 자기 정체성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복음적 식별을 위한 수도자의 관상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게다가 각 회원들에게는 지난 총회의 결정 사항들을 언택트 시대에서 새롭게 재해석할 과제가 맡겨져 있다.
과연 나의-우리의 '변방'은 어디인지, 행함(doing)보다 존재함(being)의 선교는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또 성모 마리아의 방문(visitation)을 이 감염병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하는 얘기들 말이다.
관상 아니고서야 이에 대한 답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형제적 친교로 공동체 다시 엮기
비대면 시대가 불러온 쓰레기 대란 만큼이나 심각한 변화는 가상 관계 증가였다.
모든 것에 음양이 있듯 가상화가 주는 이로움과 효용성도 꽤 있어 지금은 세상이 이에 점점 적응해 가는 듯하다.
하지만 가상 관계 증가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약화시켰고
개인주의나 무관심, 지역/국가 이기주의, 상호간의 불신과 혐오를 부추기는 결과도 가져왔다.
이런 시기에 발표된 교황 프란치스코의 회칙 <모든 형제들 Fratelli Tutti>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이번 회칙의 핵심 단어가 바로 진정한 우애와 배려를 근간으로 한 '형재애'이기 때문이다.
일찌기 교황은 신앙과 형제애의 관계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해 왔다.
"신앙은 믿는 이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 이들 안에서 지지하고 사랑해야 할 형제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축성생활자들에게 있어 형제적 친교는 매력적인 증거자의 모습이자 사명이다.
봉헌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뜻(사도 4, 32)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 일어나며, 이런 축성생활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에 이끌려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봉헌생활 20~21).
즉, 공동체 생활은 조화로운 다양성 안에서 서로가 형제요 이웃이 되어주도록 촉구되는 수도자들의 사명이다.
얼마 전 예수회 총장 아르투로 소사 신부님도
예수회원들이 공동체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응답했다.
"공동체 생활은 단지 여러분이 공동체에 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사명입니다."
2019년 수도회 총회에서도 이 주제가 거듭 강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하늘나라는 '관계의 재창조'에 있다.
복음화한다는 것은 폭력이나 저속한 경쟁으로 인해 파괴된 천을 다시 짜깁기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 안에서의 공동체 생활은 말처럼 그리 쉽지도, 또 만만하지도 않은 것 같다.
개개인의 책임 있는 변화와 더불어 구조적인 변화도 시급해 보인다.
국내 여성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수도자들이 느끼는 장상과 회원들 사이의 소통 구조, 공동체에 대한 수도회원들의 능동적인 참여,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 신괴심이나 소속감, 그리고 서로 간의 대인 관계에 대한 만족감이
그리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감염병 시기를 지내오면서 개인과 공동체의 행동반경이나 관계적 교류가 더 위축되었기에,
공동체 내의 원활한 소통 구조나 공동체에 투신하려는 역동성 역시 이전보다 약화 되었을 거라 여겨진다.
의식 없이 이대로 흘러가다간 우리의 삶도 가상화/개인화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도처에서 이미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수도공동체도 성령에게서 오는 징조에 활짝 열려야 할 때가 왔다.
형제적 친교맺음은 수도자들간의 관계가 어떠한 권력이나 종속의 구조를 넘어
'사랑 안의 일치'라는 지평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공동체가 끊임업이 지향해야 할 관계의 모델이며,
낡은 체제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그리스도적 삶의 방식 안에서 깨어진 관계들을 나날이 회개/회복하는 공동체 관계 엮기 또한 절실하다.
수도원은 세상의 갈등과 분열을 포용하는 곳이다.
거대한 돌연변이가 되어 가고 있는 배제와 소외의 문화에 맞설 강력한 대안이 수도원 안에서부터 재건되어야 한다.
진정한 관계 맺기, 개인주의를 넘어 공동체 지향하기, 습관화된 공격성과 맹목적 분노 순화하기,
다양성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기,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기.
이런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고(요한 13, 35) 거기서 희망의 대안을 발견할 것이다.
생태적 회개의 출발점, 수도원
올여름, 가뜩이나 코로나로 힘든 상황에서 한반도는 또 다른 직격탄을 맞았다.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는 주거 빈곤 및 에너지 빈곤 계층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소비, 폐기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인수공통 감염병이나 기후 위기를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소비주의와 쓰고 버리는 문화로 인간 개인도 일회용 취급당하는 이 시대에
이웃과 피조물의 고통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또 그들의 가난에 어떤 방식으로 연대할 것인가?
수도자는 고통에 찬 현실을 새로운 시선으로 관상하는 사람이다.
'울부짖는 우리 어머니 지구 앞에서'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검소한 생활 양식을 채택하는 것은 관상행위로 연결된다.
또한 이런 삶의 양식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생태적 소명을 증진하는 생태교육으로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는 것도
에너지 빈곤층과의 구체적 연대 방식이 될 것이다.
수도자들이
"먼저 바뀌지 않는다면, 덜 탐욕적이고 더 평온하며, 덜 걱정하고 더 존중하며,
더 형제적인 또 다른 삶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독려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생태론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 사랑하는 아마존 58)
우리는 피조물과의 완전한 조화 안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교황 프란치스코, 찬미받으소서 98)을
따라 '기후 정의', '지속가능성', '에너지 자립'등의 가치를 수도원 담장 안에서부터 실천하는 삶으로 초대되었다.
실천 없는 기도는 공허할 뿐이나, 살아있는 기도는 세상에 빛을 준다.
다시 쇄신(刷新)
감염병 시대는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측면을 보게 했다.
생태적 회심과 돌보는 문화가 창조 세계 보존을 위해 얼마나 절박한지 매일 느낀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쇄신의 물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경직된 모습으로
저항만 하는 관습인 낡은 부대가 새 포도주를 견디지 못함은 자명하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우리는 늘 이렇게 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안이한 태도를 버릴 것과,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 공동체가 지닌 복음화의 목표와 조직,
또 그 양식과 방법을 과감하게 창의적으로 재고할 것을 거듭 요청하신다.
이미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의 충실함과 동시에
익숙한 구조와 삶의 양식을 과감히 바꾸는 용기가 절실해졌다.
익숙함을 넘어 새로움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쉽지도 달갑지도 않은 일이다.
사실, 불편하고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변화의 시도는 인간이 하지만
그 변화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말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바오로의 뜨락, 2020 겨울 제1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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