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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_우리 신앙 선조들이 순교 기림에 대하여

  • 말씀
  • 2022-09-20 10: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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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_ 우리 신앙 선조들이 순교 기림에 대하여

 

교회는 순교로 신앙을 지킨 선조들을 매년 기리고 그 깊은 뜻을 마음에 새긴다. 그러나 순교는 불편한 주제다. 아무리 숭고하고 장엄한 죽음이라도 순교는 피비린내를 내기 때문이다. 유혈이 낭자하는 순교의 발자취는 스승이신 나자렛 예수의 죽음이 그 시초가 되었다.

아울러 어린 교회가 받은 초기 300여 년의 모진 박해와 잔인한 살육은 끔찍하고 몸서리치는 교회사의 첫 장이 되었다. 이천여 년을 비틀거리며 걸어온 교회의 발검음에도 수많은 박해와 순교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1791년 신해년을 시작으로 1866년 병인년까지 176년에 걸친 조선의 박해와 순교는 유독 교회순교사의 특별한 장이 되었다. 한국 교회는 그 초석이 선교사 없는 자생적 교회였고, 그 시작과 함께 박해와 순교가 동반 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가 그러했듯이, 조선의 박해와 처형도 교우들의 숫자를 줄이기는커녕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 로마제국과 조선조정이 무자비한 탄압과 사형을 단행하던 시대에 멸문과 망신을 무릅쓰고 입교하던 이들의 결연한 다짐은 오늘날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단언컨대, 그 순교 선조들에게 믿음이란 현세 생활에서 입신양명이나 출세를 거드는 방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그 시대 천주교 교우들은 신앙 때문에 패가망신을 자초한 얼뜨기, 인생 탈락자였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 지혜서는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3,2-3)진다고 빗대어 노래한다.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인생 전부를 걸고 사는 사람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는 통찰이다.

 

그런데 스승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을 가리켜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하신다.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셨던 스승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똑같은 죽음의 결의를 요청하신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십자가 형벌을 오랫동안 처형제도로 운영했거니와, 역대의 순교 성인들은 이 십자가의 요청이 결코 영적인 비유가 아니었음을 분연히 입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십자가를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은 당연히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어떤 역경과 환난과 죽음의 위험"에도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듯이, 하느님과 맘몬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신 스승이셨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우들이 능히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있듯이 살아간다. 

신앙의 힘으로 세상에서 윤택하고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누리고, 신앙이 매끄러운 인생 가도를 닦아줄 것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이런 이들에게 십자가는 그마저도 고상한 예술 작품으로 비춰질 뿐이다. 

알다시피 십자가는 승리와 성공이 아니라 패배와 죽음의 표지이고 저항과 고통, 그리고 시련을 담고 있다. 그 저항과 고통은 현세에서 수많은 불의와 불평등, 차별과 폭력, 군비증강과 전쟁, 탕진 수준의 소비 문화, 그리고 생태 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교우들이 기득권에 편승하고 특권을 구가하며, 전쟁 이익을 추구하고 기후 위기로 치닫는 소비문화의 수혜자로 남겠다고 한다면 십자가로 신앙을 증거한 선조들을 진정으로 그 깊은 뜻을 새긴다고 할 수 있을까.

 

발췌: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빛두레>, n.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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