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발췌,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바오로의 뜨락>, 나이테 n.138(2022 여름)
작년(2021년) 10월 17일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일제히 개막 미사를 거행하면서 제16차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이하 '시노드')가 3년의 여정을 시작했다. 지금-현재는 각 교구와 수도회, 여러 단체가 내놓은 결과물들을 종합해서 한국 교회의 시노드 결과로 다듬는 단계를 지났다.
애초부터 시노드가 일회성 회의가 아니라 지속적인 교회 쇄신 과정으로 마련된 만큼, 신앙인들의 관심과 기도가 계속되어야 할 줄로 안다. 시노드의 신학적 배경과 의미, 진행 방법 등에 대해서는 여러 교구 홈페이지만 검색해 보아도 제법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시노드의 일반적인 이야기 말고 시노드를 통해 쇄신하려는 교회의 사명과 권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대안 사회요, 친교의 성사인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복음의 증인으로 불린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교회를 이루고 당시 세계 제국으로서 위용을 떨쳤던 로마에서 일종의 대안 사회를 만들어 간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의 로마 사회는 극소수의 엘리트 지배층과 절대다수의 피지배층으로 엄격히 구분된 사회였다. 로마 제국 전체 인구의 약 28%에 해당하는 소농, 과부들, 고아들, 거지들, 장애인들, 미숙련 노동자들, 죄수들은 하루하루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사회적인 시혜와 돌봄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 사회가 기본적으로 그리스-로마 문화 특유의 '후원'(patronage)제도에 기반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엘리트들은 후원 관계를 통해 자기 패거리를 형성하고, 이 집단에 참여하는 이들에게만 도움을 베풀었다. 오늘날도 그 후원제도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마피아 집단이다. '패밀리'를 자처하는 이 집단에 속하려면 후원받는 처지에서는 후원을 베푸는 상위 계급자들에게 뭐라도 갚을 것이 있어야 한다.
그처럼 그리스-로마의 후원제도 안에서 인간관계는 '오직 갚을 수 있는 자에게만 베푼다'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윗사람에게 잘 보여서 패거리 안에 들어가야 얻어먹을 것이 생기고 이 패거리가 베푸는 혜택에 대해서 어떻게든 갚을 방법이 없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예수님이 늘 찾아다니셨던 사람들은 패거리에 들기 힘들었던 사람들이었다. 복음서는 예수님 주변에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증언한다.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거나 병 때문에 공동체에 어울리기 힘든 사람들, 가진 게 너무 많거나 너무 없어서 관계를 단절하고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 덕분에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아버지께 인도하시면서 그 어떤 조건도 달지 않으셨다. 성부의 조건 없는 사랑을 일깨우고, 사람들이 서로에게 모든 조건을 달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간직한 채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까지 찾아다니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사명이 정점에 이른 것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곧 파스카 신비에서였다. 예수께서는 죽음이라는 가장 외로운 순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고통에 함께하셨고, 성부께서는 성자의 부활을 통해서 수난과 고통이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증하셨다.
성령께서는 파스카 신비를 목격한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시고 예수께서 하시던 사명을 이어가게 하셨다.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 안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불러모으는, 그래서 모두가 새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사명말이다. 교회의 존재 의미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바로 이 사명에 달린 것이다.
과연 초기 그리스도인 집단은 사명에 걸맞게 로마의 패거리 문화와 구별되는 교회다움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회경제적 하위 계층에 속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부자들과 권력자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억압과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루카 12, 11-12; 사도 4, 1-3; 8,1-3; 12, 1-4; 2코린 11,23-17; 히브 10, 32-34 참조).
이런 맥락에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 예루살렘 공의회는 가난한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드러낸다.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두었으며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재분배하였고, 그 결과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도 2, 42-47).
시간이 흘러서 교회가 점점 더 세를 불려가는 과정에서도 교회는 본질적인 사명을 잊지 않았다. 특히 안토니오 역병(서기 165-180년), 치프리아노 역병(250-270년) 같은 감염병 대위기 속에서 환자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버리지 않고 돌보는 교회의 모습은 수많은 이들을 감화시켜 교회로 불러들였다.
그 때문에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고, 가난한 이들뿐만 아니라 부유한 이들과 사회적 엘리트까지 품에 안게 되었다.
-교회의 사명과 권위
그런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수록 집단의 분열과 와해를 막는 권위가 필요하게 된다. 교회 공동체도 권위가 필요했는데, 일반 사회가 그러하듯 부와 권력을 쥔 엘리트 집단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일반 사회와는 다른 형태의 권위가 서 있어야 했다. 세속적인 능력이나 위세와는 전혀 다른 그 권위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의 권위를 닮은 것이어야 했다.
하느님께서 끝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내어주시듯, 교회의 권위는 가장 소외된 이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했다. 교회가 로마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아니라 전문적인 성직자 집단을 길러내어 교회 일을 맡긴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 있었다. 공동체의 중심으로 갈수록 더 낮은 곳을 향하는 겸손한 사람,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사정을 가장 잘 보듬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권위를 가지게 하려는 이치였다.
물론 이러한 권위는 권위를 행사하는 몇몇 사람들만 독점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힘을 가지면 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고, 한 번 맛 들인 권력은 사람을 겸손이 아니라 군림하는 쪽에 세우기 십상이다.
교회도 이런 위험으로부터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성직자들이 교회 권위의 참모습, 그러니까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가장 큰 권위를 누린다는 점을 잊고 세속의 군주처럼 군림할 때 교회는 제 사명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는 성직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자체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떠나서 부유한 이들의 집단, 엘리트 집단이 되고자 할 때,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명이 아니라 패거리 문화의 또 다른 예로 전락한다.
이번 시노드는 교회가 고립된 패거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세상에 드러내는 참된 성사로 살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의 문화 자체를 일신하려는 기회이다.
-아래를 향하는 교회
그런 면에서 나-개인적으로는 시노드가 '위'를 향한 성토의 장에 그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시노드는 '아래'를 향함으로써 새로운 바람을 들이는 환기구여야 한다. 성직자, 수도자가 반드시 모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능력자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에는 그 일을 해낼 능력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의지를 가진 이들이 분명히 있다.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도 좋은 뜻과 능력은 가진 이들이 많다. 교회와 사목자가 할 일은, 그 능력과 의지를 하느님 뜻대로 쓸 수 있도록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 머물면서 '여기 이 사람을 보십시오'라고 가리키는 표지가 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교회가 친교의 성사임을 드러내도록 불림을 받았다.
"위에서 안 움직이니까", "위에서 안 시키니까", "여건이 안 되니까"라는 말로 묻어 버릴 수는 없는 절박한 처지와 목소리는 우리 주위에 늘 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외로움을 넘어 우울의 나락으로 빠져 버린 이들, "진정한 대인 관계의 발전을 차단하면서 사람들을 중독과 고립의 위험, 그리고 구체적 현실과의 접촉을 점차 잃을 위험"(회칙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8항)에 노출하는 디지털 매체에 눈과 귀와 입이 가려진 이들, 2020년 기준으로 사치품 매출 세계 7위에 오르도록 열광적 소비주의와 이기적 자기 보호에 더욱더 빠져드는(회칙 <모든 형제들>, 35항) 이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
반려동물에게는 옷을 입히고 간식을 사다 줘도, 제 육친에게는 양말 한 켤레 사다 드리지 않는 단절된 세대가 주위에 있다. 우리가 시노드를 통해서 사람들을 외로움에서 함께 함으로,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허세에서 현실로 방향을 돌리게 할 수 있다면, 시노드란 얼마나 좋은 기회일까.
시노드는 단지 교회의 의사결정 과정을 변화시키고 교회 권위의 분발을 촉구하는 대회가 아니다. 그보다 우리가 모두 교회라는 모습으로 세상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드러낼 사명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구별되면서도 한 분이듯이 인간의 삶도 각자가 침해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면서 동시에 '한 마음 한 몸'을 이루도록 변화시키는 계기여야 한다.
인간은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은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다. 이 더불어 사는 삶은 군림이 아니라 겸손이, 명령이 아니라 경청이, 소외가 아니라 포용이 공동체의 원리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세상의 권력의지에 굴복하지 않고 성령의 보호 안에 머물면서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갈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다(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 교회가 오랫동안 바쳐 온 이 기도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기를 바란다.
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