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그래요./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정현종, <비스듬히>
두 획이 비스듬히 서로 기대고 있는 ‘사람 인’人자가 보여주듯 사람은 비스듬히 서로 기대며 살아간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도 쓰러지는 식으로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다. 주기만 한다거나 받기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시인은 하늘 향해 꼿꼿이 선 나무들조차 공기에 기대어 산다고 했고, 옛 어른들은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고 하늘은 사람에게 의지한다고 하였다고 흔히 말씀하셨다. 먹어야 살 수 있는 게 사람인데(人依食而資其生成)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조화를 나타낼 수 있는 게 하늘(天依人而現其造化)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밥은 누구에게 기대나? 사람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 쌀도 밥도 없다. 이처럼 밥과 사람과 하느님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기댈 어깨를 내어주며 살아간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콜로 1,26)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라고 했다. 구원자 그리스도조차 모자란 부분이 있어 모자란 자신이지만 힘껏 채워드리는 중이라고 한 것이다.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더이상 ‘다른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또한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모든 형제들> 3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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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일회의 손님맞이
한창 더운 대낮인데 세 길손이 누군가의 천막 어귀에 나타났다. 주인은 곧바로 달려 나가 그냥 지나치지 마시라고 엎드려 말한다. 선한 타자인지 위험한 타자인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일기일회(一期一回), 내가 이 사람과 만나는 것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생각에 그리하였다.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차려 놓으니” 세 손님은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며 원기를 돋웠다. ‘그들’을 대접하던 아브라함은 ‘그분’이 방문하신 줄을 꿈에도 몰랐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하실 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나저나 하느님도 종종 배가 고프신가 보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마태 25,35)는 말씀을 실천한 또 다른 사례. 어떤 여자가 자기 마을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 창세기의 사라처럼 그의 마음도 바빴다.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고운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굽고,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요리하여 나그네들을 대접하던 옛 마음은 그대로였으리라. 그런데 고대의 길손들은 여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빈손으로 남의 집을 찾는 법이 없었다. 손님들이 뜻밖의 선물을 내놓았다. 어떤 집은 대를 이어줄 아들을 얻었고(창세 18,10), 어떤 집은 “좋은 몫”(루카 10,42) 곧 생명을 주는 “그분의 말씀”(루카 10,39)을 얻었다.
초기교회의 환대 전통
(*다음은 김종철 교수가 행한 인생 마지막 강연에서 몇 군데 따옴) … 오랜 인류사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나름대로 문명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 관계에서 예를 갖추고 살도록 만든 원초적인 힘은 환대의 사상입니다. 필요한 사람, 굶주린 사람, 길 잃은 사람 손을 잡아주고 밥 먹여 주는 것 …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던 친절, 환대라는 풍습이 언제 사라졌는가.
어떤 신부가 20세기 초에 중국 북경에서 로마까지 도보로 여행을 했습니다. 그때 발견한 사실이 환대의 풍속이 동양에는 살아있는데 서양 쪽으로 올수록 죽었다는 거예요. 환대가 가장 많이 살아 있는데가 중앙아시아, 소위 말하는 서구 문명이 가장 덜 침입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문명권으로 들어가면 이 풍속이 없어지더라는 거예요. 그 대신 여기저기에 국가가 운영하는 구빈원, 교회가 운영하는 자선원 같은 시스템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환대가 뭡니까. 환대는 비시스템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한테 친절을 베푸는 행위입니다.
서구에서 환대라는 풍습이 깨진 것은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된 4세기부터라고 해요. 초기에는 교회가 핍박을 많이 받잖아요. 그때는 완전히 개인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돌아가는 믿음의 공동체였어요. 그래서 환대가 생생하게 살아있었어요. 신자 가정이라면 양초와 마른 빵과 담요를 구비하고 있었답니다. 언제 어느 때고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불을 밝혀서 집 안으로 들여야 하니까 초가 필요하고, 배고픈 사람을 앞에 두고 빵을 만들 수 없으니 마른 빵을 준비해뒀다가 제공하고, 이 사람이 자고 가겠다면 담요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신자 가정 필수품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다 국가가 교회를 공인하면서부터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필요한 사람을 돕던 환대의 풍속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이반 일리치는 근대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환대가 사라지는 것이 근대문명의 출발이라는 것이지요.
(*“생명사상과 환대 윤리”, <녹생평론> 2020년 174호)
호스트(주인)와 게스트(손님)
영어에서는 호스트와 게스트가 따로따로이지만 라틴어 계열에서는 한 단어가 주인과 손님을 동시에 가리킨다.(예를 들어 라틴어 hospes, 이탈리아어 ospite) 환대 속에서 주객 구분이 사라지게 만들던 전통의 희미한 흔적일까? 하기는 공수래공수거 인생에서 처음부터 주인이었던 자가 누가 있으랴. 지금은 자기 집을 가진 주인이라도 이집트 땅에서 그는 이방인이었다. 성경은 낯선 이들을 모른 체 하지 않고 ‘자신의 혈육’(이사 58,7 참조)으로 체험하는 일을 믿음의 행동으로 여긴다.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라던 주선 사람들은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고 해서 손님 대접을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처럼 중시하였다.
*갈무리,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빛두레> 제1567호, 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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