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존 웨스터 대주교,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대교구
*글쓴이: 박은미,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대표, 품 심리상담센터장
그리스도의 평화의 빛 속에서 살아가기 Living in the Light of Christ's Peace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올해 초인 2022년 1월,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대교구, 존 웨스터(John Wester) 대주교가 '핵 폐기를 위한 대화'라는 주제의 사목서한을 내놓았다. 의정부교구 동북아평화연구소에서 이 서한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간한다(비매품). 서한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평화의 빛 속에서 살아가기>다.
2020년 8월 6일 일본 핵공격 75주년 기념일을 맞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해 기도와 헌신'을 촉구하며, 핵 폐기에 대한 전 지구적인 대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하셨다. 웨스터 대주교는 교황의 이런 제안에 부응하여 산타페 대교구에 속한 신자들, 미국 내 모든 신자, 나아가 전 세계 신자들에게 핵 폐기를 위한 대화에 나서 줄 것을 제안하기 위해 사목서한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서한은 웨스터 대주교가 2017년 9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여행하며 느낀 소회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1945년 8월 6일, 인류가 핵시대의 어둠이라는 선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은 암울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수십억 명의 사람을 한 번에 죽이고 심지어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세상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거닐면서 이런 사악한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 전신관에서, 1945년 8월 그 운명적인 아침에, 히로시마의 학생들이 밝은 불빛에 이끌려 창문으로 달려갔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불에 타 죽거나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어가야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보통 빛은 새로운 삶과 더 명확한 시야를 갖게 해 줍니다. 하지만 그 날은 아니었습니다. 슬프게도, 전쟁에 사용된 최초의 핵폭발로 생성된 빛은 오로지 파괴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서한을 읽으며 왜 유독 산타페 대교구의 주교가 핵폐기 제안을 담은 서한을 내셨을까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웨스터 대주교가 관할하는 뉴멕시코주 산타페 대교구에는 미국 3대 핵무기 실험실 중 2곳인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와 샌디아(Sandia) 국립연구소가 있다.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한 원자폭탄('리틀 보이'와 '팻 맨')을 설계하고 생산한 핵무기의 발상지이고, 세계 최초의 원자 폭발이 이루어진 트리니티 실험은 뉴멕시코 중남부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로스 알라모스 실험실 토지의 대부분은 아메리카 원주민 선조들과 히스패닉 정착민들에게 적절한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압류되었다고 한다. 웨스터 대주교는 미국이 이런 식으로 식민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체계적인 폭력의 유산을 이어갔다고 비판하면서, 산타페 시가 핵무기의 발상지이기에 바로 그런 이유로 핵폐기 대화를 시작해야 할 장소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서한에는 역사적으로 산타페 대교구가 피스빌딩 활동을 주도해 왔다는 사실이 소개되어 있다. 산타페 신자들은 이미 수십 년 동안,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창조적인 대화를 나누며, 국립연구소에 핵무기 개발을 중단할 것을 요구해 왔고, 1982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평화를 위한 연례 에큐메니컬 및 종교간 기도 순례(an annual ecumenical and interfaith Prayer Pilgrimage for Peace)를 후원했고, 15년 전부터 매년 8월 6일(히로시마 기념일)에 로스 알라모스까지 걸어 가 니네베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자루옷과 재를 걸치고 앉아 30분 동안 침묵 기도를 하며, 연구소가 핵무기 생산을 중단하고, 핵폐기물을 정화하고, 연구원들이 비폭력적인 일에 종사하기를 요청하는 시위를 벌여 왔다는 것이다.
웨스터 대주교는 전 지구에 드리워진 핵 위협에 걸맞는 긴박성을 지니고, 산타페 대교구 소속의 모든 신자와 시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신자(시민)에게 핵 폐기라는 목표를 향한 중대한 대화에 참여해 달라고 호소한다. 각 지역 국회의원, 핵 관련단체, 주류 언론에도 핵 폐기 이슈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압박하는 시민행동을 벌이자고도 한다.
지구 최강대국이자 최대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에서 이렇게 담대한 목소리를 내는 대주교가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는다. 웨스터 대주교도 서한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활동은 사실 엄청난 부담을 져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평화라는 임무를 위해 예수님께서 제자를 두 사람씩 보내셨듯이, 웨스터 대주교는 우리 역시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사명과 권능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건해 질 수 있다고 격려한다.
"핵무기 사용은 말할 것도 없고 핵을 보유하는 일조차 부도덕한 일"이라고 비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호소에 부응하여, 우리 신자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핵 폐기를 위해 도모할 수 있는 활동을 찾고 나서야 할 때다.
"악 앞에서 침묵하는 일 자체가 악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이요, 행동하지 않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가톨릭대학교 협력연구소 한국가톨릭여성원구원 소식지 <품>, 제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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