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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재하라고 너를 부른다

  • 말씀
  • 2022-06-24 19: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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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사목 연구원, <빛두레> 제1564호, 쉐마(들어라)글을 옮겨옴

 

주님의 제자들 중에는 열두 제자만 있는 게 아니다. 재가在家 제자들도 있었고, 숨은 제자들도 있었다. 

 

모양은 제각각

첫째,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집을 떠난 사람들이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어른을 선생으로 모시느라 풍찬노숙의 고초가 심했다. 삼장법사의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처럼 혼나기도 많이 혼났으며(루카 9,55),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 보니 스승처럼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그룹에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있었다.

둘째, 예수님 일행을 기다렸다가 맞아 주고 밥과 잠자리를 내어 드리던 베타니아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 같은 재가 제자들이 있었다. 집을 떠나지도 않고 예수님을 동행하지도 않았지만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개시되었음을 보여 주던 엄연한 제자요 일상의 증거자들이었다.

셋째로 예수님을 도와드린 단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숨은 제자들'이 있었다.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 시신을 거두게 해달라고 했던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요한 19,38), 몰약과 침향을 들고 와서 염습을 해 준 니코데모(요한 19,39), 지상 최후의 만찬을 위해 기꺼이 방을 내어드린 "도성 안 아무개"(마태 26,18) 같은 인물들이다. 복음서 곳곳에는 평소 은인자중하다가 이때다 싶으면 아무 두려움 없이 대범하게 뛰어드는 사람들이 숨어 지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사도단의 열두 제자가 되고, 누가 재가 제자나 숨은 제자가 되는가? 부르심의 주체는 스승이니 제자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9,57) 했던 사람은 퇴짜를 맞고 엉뚱한 "다른 사람"이 따르라는 지명을 받았을 정도다. 한편 밭을 갈다가 부르심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1열왕 19,19), 평소처럼 세관에 앉았다가(마르 2,14) 혹은 그물을 던지다가(마르 1,16) 낚인 사람도 있었다. 시절 인연 따라 서로 다르게 느닷없는 호출을 받고 따라나섰다. 어떤 유형의 제자로 살든 상하경중을 따질 수 없다.

 

다 좋고 다 귀하다

만주 들판에는 지금도 삼전三田이 전해온다. 일제 때 쫓겨 들어간 우리 조상님들은 눈보라 속에서 맨 손으로 일궈낸 논을 3등분하였다. 하나는 독립 운동하는 데 바치는 군전軍田 으로, 또 하나는 아이들 학교 세우는 학전學田으로, 나머지 하나는 굶주림을 이겨내는 생전生田으로 삼았다. 농민들이 단호히 살아내신 삼전이 없었다면 독립에 헌신했던 투사들도 없었고, 조국광복을 꿈꾸던 인재들도 없었을 것이다. 삼전의 아버지, 어머니들이야말로 독립군의 당당한 일원이요, 교육입국의 떳떳한 주역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열두 사도로 불리는 '셀럽'들뿐 아니라 재가 제자들도, 그리고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 또한 명실상부한 예수의 도반이며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일구던 동무였다. 아무런 타이틀도 직책도 없었지만 착한 마음 하나로 죽는 날까지 제자의 도리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야말로 또 다른 모퉁이 머릿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한 알의 씨앗으로 가신 임의 거룩한 보람 새겨 새로이 태어나려는"(광주신학교 교가) 장한 뜻으로 "신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서울신학교 교가) 노래하기 시작한 세월이 올해로 몇인가. 얼마나 왔는지 되돌아보고 얼마쯤 남았는지 이마에 손을 얹고 내다 보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다만 거룩하신 사부께서 가신 그쪽을 향할 뿐.

 

종살이 하지 말라고

그때 그 시절 모자란 사람을 불러 주신 까닭이 문득 궁금해졌다. 선지식 바오로 사도가 이 질문에 대답한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라 5,1.13) 돌이켜보면 주님은 내가 "성령의 인도"와 "육의 욕망"(갈라 5,16)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서성거릴 때 자유의 길을 함께 걷자고 손짓하셨다.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면 (결국은) 서로가 파멸할 터"(갈라 5, 15) 후련하게 "종살이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인간의 길을 달려가자며 미몽을 헤매던 나를 흔들어 깨우셨다.

 

오직 "자유롭게 하시려고"(갈라 5,1), 오로지 "자유롭게 되라고"(갈라 5,13)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라. 오직 자유, 오로지 자유다.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하지 않거나 나 스스로를 말미암을 뿐이라서 나는 자유自由다. 누구에게도 매이지도 무엇에도 눌려 살지도 나로 말미암을 뿐이니 나는 자재自在이다. 본시 자유자재란 '존재 자체ipsum esse'이신 하느님의 삶인데 우리더러 자유자재로 살라고 부르신 것은 하느님처럼 살라는 혹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라는 아찔한 초대다.

 

신학생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육신의 욕망인 욕심을 따르면 종살이를 면할 수 없고, 성령의 인도인 양심만 따르면 아쉬울 것 없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고. 육신의 바탕인 먼지의 명령을 따르면 허무한 인생이 되고, 생명의 숨인 성령의 목소리를 따라 살면 자유롭고 충만한 인생이 된다고. 매주일에 교우들에게 하는 강론도 결국은 같은 소리다. 

그러고 보니 오늘까지 듣기도 많이 듣고, 말하기도 많이 하며 살아온 나는 자유로우며 자재하는가? 성경이 기준을 이렇게 알려준다.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있다면 자유, 사랑하되 그분에게 받은 그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자재라고.

 

쌀 대신 미사일

대한민국에 명색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교회가 수두룩한데도 정작 제 혈육을 사랑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어 보인다. 쌀도 넘치고 백신도 남아도는데 버리면 버렸지 북쪽에는 덜어줄 수 없는 모양이다. 지난 6월 6일 가진 건 대포 밖에 없는 북에 맞대응 하느라 새 정부가 아무 죄도 없는 동해에 백억 원 상당의 미사일 여덟 발을 쐈다. 언론들은 '맞불 미사일'이라며 손뼉을 쳤다. 이 놈의 종살이는 언제나 면할까?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이 3년 전 꼭 이맘때였는데 맙소사 ... . 어지러운 속을 달래느라 애써 시 한 편을 찾아 읽는다.

 

그해 여름 아우라지 술집 토방에서 우리는 경월 소주를 마셨다/ 구운 피라미를 씹으며 내다 보는 창밖에 종일 장마 비는 내리고/ 깜깜한 어둠에 잠긴 조양강에서 남북 물줄기들이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염이 생선가시같이 억센 뱃사공 영감의 구성진 정선아라리를 들으며/ 우리는 물길 따라 무수히 흘러간 그의 고단한 생애를 되질해내고 있었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쪽이 나지만

-삼팔선 깨어지면 한 덩어리로 뭉치지요

한순간 노랫소리가 아주 고요히/ 강나루 쪽으로 반짝이며 떠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흐릿한 십촉 전등 아래 깊어 가는 밤/ 쓴 소주에 취한 눈을 반쯤 감으면/ 물 아우라지고 사람 아우라지고/ 우리나라도 얼떨결에 아우라져 버리는 강원도 여량 땅 아우라지 술집 -이동순, 아우라지 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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