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초롱초롱 빛나던 별들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환한 얼굴을 보여 주셨다. 밤하늘의 별이 빛났다고 해서, 스승의 얼굴이 빛났다고 했지만 아무일도 없었다. 세상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빛나는 별들과 눈부신 얼굴은 일종의 증거였다. 나는 반드시 언약을 지킨다, 서럽고 힘들더라도 견뎌내기 바란다며 손에 쥐어준 사랑의 정표였다.
사순절의 여정은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으로 시작해서, 파스카 성야에 성수를 뿌리는 예식으로 완결된다. 재의 수요일에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던 사람은 부활성야에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났도다."하는 복음을 들을 것이다. 그러려면 괴롭고 고단한 '사십일'을 보내야 한다.
사순 둘째 주일은 그런 괴로움에 값이 있음을 깨닫는 날.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부처님은 고苦, 공자님은 난難이라고 답하셨다. 예수님은 묵묵히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즐거울 때도 괴로울 때도 있다. 즐거움에는 맛이 있고, 괴로움에는 값이 있다. 즐거울 때는 그 맛을 음미하면 되고, 괴로울 때는 그 값어치를 알아내어 꾹 참아야 한다. 즐거움은 남과 나눠도 되지만 괴로움은 홀로 견뎌야 한다.
눈물겨운 고생이고 쓰디쓴 고역이라도 괴로움(苦) 가운데 태어나는 (生) 무엇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고생이라고 한다. 값없는 괴로움은 없다. 그러므로 곤경이 닥치면 "오냐, 값진 때가 왔구나!" 하면서 반기는 게 진짜 배짱이고 참다운 담력이다. 요컨대 남의 고생은 삼가는 맘으로 조심조심 거들고, 자기 고생은 은총으로 여겨 꽉 잡고 꼭 끌어안자는 것이다. 그럴 때 겨울의 혹독한 시련은 봄날의 꽃으로 피어난다.
남의 고통은 어떻게 봐야 할까? 사람에게 필요한 필수 기본교양이라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일 것이다. 신앙인이라면 더더욱 공명과 감응의 능력이 남달라야 한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릴 줄만 알아도 평화는 싹 튼다. 낮은 자리에서 힘들게 일하는 분들이 누구인지 알아주고, 그들의 수고에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
밑바닥에서 고생한다고 그저 안타깝게 여기는 감상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들의 고난에 세상을 정화하고 구원하는 힘이 들어 있음을 알고, 빚진 마음으로 고마워해야 한다. 푸대접 받는 "노동자 농민이지만 그들이 오늘의 성찬을 마련하는 예수요, 빨래하고 청소하는 여인네들이 한가한 선비와 귀족들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구세주"(류영모)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 깨달음이 신앙이다.
아침저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도 그 점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어 행세 못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짐들을 도맡는다. 무거운 짐도, 더러운 짐도 언제나 그들 차지.
짊어져 주는 그들의 천신만고가 아니면 세상은 당장이라도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어딜 가나 이래서 지고 저래서 지는 못난이들의 갖가지 "져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자. 그들이 '져주는 것'은 무식무능하거나 나약나태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져줄 수 있는 사람, 곧 큰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럴 힘을 가진 존재라서 그렇다.
십자가를 져주신 예수님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고로 묵묵히 져주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고개를 숙이고 맘으로 우러러야 한다.
-빛두레 제1549호, 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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