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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정(축일)에 바치는 찬가(讚歌)요 애가(哀歌)

  • 말씀
  • 2021-12-22 1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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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_애끊던 사흘

 

마태오복음 1장은 손이 아주 귀했던 어느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들이 마침내 “수천만의 어머니”(창세 24, 6)가 되는 이야기였다.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이고, 마침은 예수님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는 대를 이어줄 자식이 없었다. 젊어서도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노령에 이르렀으므로 기대 난망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희소식이 날아들었고, 늙은 부부는 마침내 부모가 된다. 요셉과 마리아는 혼인을 앞두고 있었지만 아직 초야를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예비부부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 젊은 약혼자들은 두려움에 빠졌다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신인(神人) 상봉(相逢)의 거점, 가정

 

아브라함과 사라, 요셉과 마리아가 가질 수 없는 아들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인간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위업이다. 과연 그러하기만 한가? 아니다. 사람이 그저 몸만 빌려 드린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하느님의 계획서를 받아들고 깊이 고뇌하다가 마침내 믿음으로써 수락하였다. 믿음의 족보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단언했던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는 마리아의 응답으로 이어진다. 그날의 고백을 들어보라.

 

“믿는 게 힘들지만 안 믿는 건 죽은 거나 진배없습니다/ 믿나이다, 주여/ 믿나이다, 살고 싶기에/ 믿나이다. 숨막혀 죽는 누군가를 살리고 싶기에, 내 겨레를 살리고 싶기에/ 믿나이다. 믿는다는 것이 주님께 드릴 유일한 보답이기에 믿나이다/ 초월자이시여, 영원자시여, 창조주시여, 구원이시여, 생명이시여, 빛이시여, 사랑이시여, 전부이시여, 당신께 우리가 가당하게 드릴 보답은 이것뿐이외다. 믿나이다!”(까를로 까레또)

 

그러므로 인간의 탄생에서는 하느님도 능동, 사람도 능동이었다. 생명은 주시는 것이며, 생명은 받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으로 주시고 사람은 믿음으로 받으니, 그제야 멈춘 듯 보였던 희망의 구원역사가 밝은 경적을 울리며 힘차게 출발하였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은 언제나 마리아와 요셉 두 분 그리고 오늘날의 요셉과 마리아님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며 모든 가정이 태평하기를 기원한다. 우리가 태어나 우리가 자라났으며 어른이 되어 우리가 이룩한 가정을 생각한다. 가정은 하느님께서 거룩한 일을 도모하시는 자리, 그래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터전이다. 가정이 있어서 하느님이 오실 수 있었고, 가정이 있어서 사람은 하느님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가정은 신인상봉(神人相逢)의 거점이라 할 수 있다.

 

다석 류영모(柳永某 1890~1981)는 삼라만상 가운데 우주의 율동을 느끼게 해주는 네 가지 상像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하나는 자면서 자라나는 어린아이의 상이다. 둘은 서서 돌보는 성모상이다. 셋은 앉아서 배기는(참선하는) 부처상이다. 넷은 나무에 매달린 그리스도 상이다. 이 네 가지, 늘 보아도 좋은 상들은 모두 가정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비롯한다. 어머니의 서서 돌보는 수고로 아이는 자면서도 자라나고, 그렇게 사랑으로 자라난 아이라야 훗날 목숨 걸고 참선하는 부처, 목숨 바쳐 천직에 매달리는 예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가정은 우주의 율동이 가장 생생하게 느껴지는 자리가 틀림없다.

 

바친 자리에서 찾다

 

부모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꼬박 사흘 밤낮을 애태웠다. 울고불고하다가 마침내 찾아낸 곳은 성전이었다. 열두 해 전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 22) 그리고 열두 해가 지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루카 2, 45-45) 심은 자리에서 싹나듯이 성전에 바쳤던 아기를 성전에서 도로 찾은 셈이다. 어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하지만 이 어머니는 그날의 실종사건을 떠올리게 해주는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그때에도 바쳤던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어떻게 모셔지는지 뚫어져라 봐두었던(루카 23, 55) 여인들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마태 28, 1), 그러니까 ‘또 다른 마리아들’은 사흘째 되던 새벽 무덤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 열두 살 적에는 슬기로운 답변으로 주변을 ‘경탄驚歎’하게(루카 2, 47), 부모를 놀라게 하시더니(루카 2, 48), 부활하시던 날에는 아예 사람들이 ‘경악驚愕(놀랄 경, 놀랄 악)’하게 만드셨다.(마르 16, 8)

 

아, 고달파라. 이래서 놀라고 저래서 놀라야 하는 부모의 운명은 참으로 서럽고 고단하다. 아브라함은 번제물 사를 장작과 함께 아들을 앞세우고 사흘 길을 걸어갔다. 그 불쌍하기 그지없던 아비는 사흘 내내 낮에는 진땀을, 밤에는 피땀을 쏟았다. 아들을 사흘 만에 찾아낸 마리아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사흘 밤낮을 통곡했다. 가련하신 우리의 아버지여, 어머니여. 인생 전체가 눈물의 ‘사흘’이거나 피땀의 ‘사흘’뿐이로다.

 

부모의 사명

 

부모의 수고는 그칠 때가 없지만 그 덕에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지며,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는다.”(루카 1, 40.50) 그래서 가정은 언제나 환하고 따뜻하고, 반드시 아늑하고 편안한 곳이어야 한다. 집에서마저 냉기가 돌면 사람은 갈 곳이 없다. 가정은 “우리가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 우리가 없으면 우리를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곳, 우리가 죽으면 통곡하는 곳,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아늑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법정)여야 한다. 그런 자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아이들이라야 천직에 매달릴 수 있다.

 

“사람에게는 천직이 있어요. 타고난 매인 곳이 있습니다. ‘타고난 매일 데’를 천직天職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은 자기가 타고난 천직을 업신여기는 까닭이지요. 천직을 버리고, 쉽게 벌고 많이 모을 수 있는 잔재주를 배워서 서투르게 일을 하니까 이 모양입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아 곧 천직을 밝혀, 그 일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천직을 타고 가면 좀처럼 다른 데로 이동하지 않아요. 마음대로 못하지요. 그런 뜻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천직에 매달린 분입니다. 천직에 매달린 모범을 통해 우리를 위한 대속을 보여주었지요. 천직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독생자가 되는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 마음으로 천직을 다하는 이가 그리스도입니다. 천직에 순직殉職한 자는 교리가 있건 없건 독생자로서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류영모)

 

성전 밖에다 나를 바쳤다

 

잃었던 아들을 가까스로 성전에서 찾았을 때 부모는 열두 살 소년이 일찌감치 천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한다. 중늙은이가 된 나의 사목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 아버지,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지 두렵다. 그나저나 갓난아기 적에는 성전에 바쳐졌던 예수님이지만 나중에는 성전 밖에서 자기를 제물로 봉헌하셨다. 새해에도 우리의 일터는 성전이겠지만 우리의 헌신은 성전 밖에서도 벌어져야 한다.

 

-빛두레(정의구현사제단, 제15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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