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혼자’가 많이 늘었습니다. 결혼을 쉽게 할 수 없는 현실 탓이 클 것입니다. 결혼의 전제가 대개 안정된 직장일 텐데, 젊은이들은 취업 절벽의 현실에서 결혼을 생각하기도 힘듭니다. 막상 취업해도 사람 사귀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귀는 상대가 있어도 결혼을 생각하기 힘듭니다. 결혼해도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키울 시간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도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아예 결혼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비혼자’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이혼도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이렇게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혈연 가족(부모+자녀)’이 점차 줄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여전히 혼자 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느슨한 연대의 관계로 전통적 가족의 필요를 채우려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해서 일종의 ‘공동체’ 주거 형태도 생겨나는 것을 봅니다. 이런 흐름은 이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의 복음은 우리 사회의 이러한 흐름에 무언의 격려를 보내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루카 2,22-40)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고, 고향인 갈릴래아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가정’이라 부르는 가정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이 성가정을 가정의 이상적 모델로 여기는 것은 너무 성급하고 피상적입니다. 이 가정은 전통적인 혈연 가족이 아닙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혼인은 했지만, 예수는 혈연으로 얻은 자식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습니다. 요셉은 심각한 고민 끝에 마리아와 혼인했습니다. 성가정은 순탄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마리아와 요셉의 고민과 결단으로 탄생했습니다. 성가정이라고 순탄한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닙니다. 성전을 찾아온 시메온은 불길한 예언을 합니다. 아기 예수는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루카 2,35)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아기 예수를 찾아내 죽이려는 헤로데는 그 지역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갓난아기를 업고 요셉과 마리아는 급히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마태 2,13-16) 난민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은 결코 쉽게 생겨나고 유지된 것이 아닙니다. 성가정은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만 봉헌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하느님에게 봉헌했기 때문에,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예수에게 헌신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많은 역경을 딛고 성가정을 꾸려 간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오늘 혈연 가정을 대체할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교회의 수도자들이 그 위로와 격려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 생활의 날’로 지냅니다. 오늘날 가족의 형태가 급격하게 변하고 해체되는 시대에, 수도자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지 않았지만, 아니 결혼을 하지 않고 혈연 가정을 꾸리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보여 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혈연 가정 대신 느슨한 연대의 관계에 기초한 공동체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하기에 따라서 보여 줄 것이 많습니다. 수도공동체를 마리아와 요셉이 서로의 헌신으로 이루어 낸 ‘성가정’을 닮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수도자들은 세상에 보여 줄 것이 많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다 몰랐지만, 마리아를 신뢰했습니다. 마리아도 요셉을 신뢰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바로 따져 묻기 전에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루카 2,19.51) 마리아와 요셉은 존중, 신뢰와 개방으로 서로 깊이 연결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은 자율성을 획득합니다. 자율성은 스스로 자기에게 규범을 부여하는 능력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자유를 가리킵니다. 규정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기에게 적용합니다. 이런 관계에서 살면 우리는 다른 이를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자존감도 높은 사람이 됩니다.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를 어른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어른으로 대하면 어른처럼 행동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이것은 나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도자의 경우, 수도 생활의 연륜 문제도 아닙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함께 살면서 그런 사람으로 성숙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손에서 자란 예수도 그렇게 성장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도자들이 수도공동체에서 존중과 신뢰와 개방이라는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여 산다면, 세상에 특히 젊은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도자들은 보여 줄 게 별로 없을 겁니다. 점점 초라해지고 말 것입니다. 하기에 따라서, 오늘날 진정한 관계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수도자들은 ‘공동체’가 무엇인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전통적 혈연 가정이 급속히 변해 가는 세상에서, 수도공동체 그 자체가 복음 선포에 소중하고 효과적인 자산입니다. 수도자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서, 더 멀리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성가정을 꾸린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소중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수도자들이 이 소중한 유산을 오늘 여기서 제대로 기쁘게 사용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오늘 이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녹색연합 상임대표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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