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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굴 성지순례 하던 날

  • 젤뚜르다
  • 2024-07-31 18: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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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굴 성지 순례하던 날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이영일(젤뚜르다) 수녀

 

대구 경산역에 가기 위해서 대전역에서 8시 6분 무궁화호 기차를 오랜만에 탔다. 오래된 기차라서 그런지 정겹다.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가득 차서 눈이 올 모양이다. 언양 성당 사무장님께 그쪽 지역 눈이 많이 왔느냐고 확인하니 다행히 눈이 오지 않았다고 하셔서 안심했다. 경산역에 도착하니 이 비오, 정 비아님 부부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대구 교구 신자분이시고 열심한 두 분은 오늘 우리와 함께 가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성지 가까운 부근에서 점심을 먼저하고 죽림굴로 올라가는 간월산을 보니 거리는 3,6km였고, 시멘트 길로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1차 순례 때에는 자동차로 죽림굴 입구까지 가서 순례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힘든 줄을 몰랐다. 지금은 담당 군에서 차단기를 설치하고 열쇠 잠금 상태라서 올라가는데 험준했다. 다행히 모두 스틱을 준비했기 때문에 스틱에 의지하면서 올라갔다. 비오 형제님은 이곳은 깊은 산 속이고 사나운 야생 동물들이 많아서 자매님들 두세 명이 순례하면 위험한 곳이라고 하신다.

 

1840-1868년에는 대재 공소로 불리웠던 죽림굴은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간월산 정상 가까이 위치한 박해시대 신자들의 피난처 굴이다. 이 석굴 공소는 대나무로 덮여 “죽림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폭 7m, 높이 1,2m 규모이지만 입구가 낮아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기해박해(1839년)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 월 공소 교우들이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하여 공소를 이룬 곳으로 신자들이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 월 쪽에서 포졸들 움직임이 보이면 100명의 신자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으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Catacombae)였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담당했다. 특히 김대건 신부와 함께 최초의 방인 사제였던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경신박해(1860)년 때 이곳에서 약 3개월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하셨고, 미사를 집전하며 스승에게 마지막 서한을 쓴 곳이기도 하다.

 

1868년 9월 14일 울산 장대에서 순교하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된 대재 공소 허장 이양동(베드로)와 허인 백(야고보)와 김종륜(누가)도 이곳 죽림굴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이 지방에서 교우 20명이 체포되었고, 뒤이은 병인박해(1866년)의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재 공소는 폐쇄되고 말았다고 한다.

 

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에 순교한 김아가다가 있다. 부산지역의 첫 신자였던 김교회(프란치스코)의 (1775-1834년) 손녀이고 병인박해 때 온갖 고문을 당해서 후유증으로, ‘장하치명’한 김영재(베드로)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아버지 김상은과 오빠 김영재가 체포되자 그 뒤를 따르고자 다른 두 처녀와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는 과정에서 포졸들이 이들을 농락하려고 하자 간신히 피해 도망친 김 아가 다는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죽림굴로 찾아 왔던 것이다. 극심한 고생으로 탈진한 아가다는 도착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누었다고 한다.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양업 신부를 도왔고, 최양업 신부가 손수 만든 짚신을 팔아 양식을 구하기도 하고 등역, 화천 등의 지역에 나가 구걸을 해서 양식을 구해 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굴로 돌아올 때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험한 길을 인도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결국 병석에 누운 아가다는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아가다의 유해는 간 월 공소 뒷산에 모셔졌다가 후에 오빠 김 영재(베드로)의 묘 옆으로 이장했다.

 

1986년 10월 29일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11명의 신자가 죽림굴을 찾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으나 실패했고, 그 해 11월 9일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당시 굴속에는 구유조각과 나무 지팡이 등이 발견되어 언양 성당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최양업 신부님이 3개월 동안 머문 굴속에서 로사리오기도 5단을 봉헌하고 성가 236장을 부르는데 목이 메었다. 밝은 대낮도 칠흑 같은 어두운 굴속 암석 사이로 떨어지는 물방울, 빛도 없고, 물도 없고, 양식도 없는 한기가 느끼는 굴속에서 어떻게 생활을 하셨을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렸다. 신앙을 위해서 고향도 집도 가족도 다 버리고 이 험준한 굴속에서 생활하셨던 다블뤼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 신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버티셨을까?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면서 긴 침묵 속에 선조 순교자분들과 나의 삶을 비교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고 얼마나 더 걸어가야 그분들의 뒤를 따라갈 수 있을까? 고뇌가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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