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오시기로 하신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지막 주간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성탄을 맞이하는 이 땅은 기쁨과 평화가 아니라 비탄과 울음이 만연하다. 촛불함성..총파업..폭등하는 대출이자.. 노인 빈곤.. 국가경제는 풍전등화의 위기.. 남북간의 무력 대치는 당장이라도 전쟁이 발발할 것 같은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둠이 전부인 사람이 간절히 희망의 불빛을 찾는 법이다. 빼앗기고 짓밟힌 사람들, 벼랑 끝으로 몰리고, 숨이 목에 찬 사람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그것은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며, 안전하게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남는 것이다. 이 소박한 바람의 시작은 사회정의의 실현이다. 지금 이 땅의 많은 이들은 이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그 표징, 정의의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지 그 표징을 애타게 찾고 있다.
비정한 통치자와 그와 결탁한 집단의 관심은 다르다. 자신의 안위가 전부인 세습 특권층들과 소위 정치 지도자라는 자들, 그리고 어리석고 포악한 통치자의 관심은 오롯이 기득권 보장이다.
아하즈 왕의 사례가 그렇다. 그는 선왕 다윗이 하느님께 의지하여 일구어 놓은 유다 왕국의 안보와 나라 살림을 강대국인 아시리아에 내어 맡기고 왕실 안전 보장에 안주했다. 그에게 백성의 도탄은 하등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표징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관심사도 아니었다.
국가 존망의 어둠 속에서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축배를 들고 있는 그들 대다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하느님 현존의 표징과 하느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희망의 약속은 차별과 억압, 그리고 폭력과 불의의 희생자들 몫이었고 여전히 그들의 차지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표징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표징은 너무 사소하고 흔한 곳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표징인 한 아기의 잉태와 출생은 인간 세상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만일 천사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요셉은 물론 누구도 마리아의 임신이 예언된 표징이라고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은 꿈에서 천사의 말을 듣고 나서 마음을 바꾸고, 자기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 요셉의 결단은 그의 하느님을 향한 의로움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의로움은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찾고자 하는 항구한 자세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요셉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표징은 기이한 사건이나 초자연적 현상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 표징은 한 가정 안에서, 초라한 동네에서,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솟아나는 새 생명의 사건이었다. 이렇게 표징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인간사에 스며드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의 평범함을 보여 준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 신비스러운 기적 속에서 표징을 찾느라 정작 눈앞의 표징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성탄의 밤에도 목동들에게 천사를 보내 '너희를 위한 표징'(루카 2, 12)이라고 알려 준 것은 그 목동들도 오시기로 하신 그분이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임박한 성탄, 우리는 희망의 불빛, 정의의 표징을 어디서 찾고 있는가?
*발췌/갈무리 빛두레 N.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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